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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잡러지영 Nov 19. 2021

아끼다 똥 된다

나의 필름 카메라


자려고 누웠는데 카메라가 보였다. 누워서 보이는 반대편 벽에 마름모꼴 나무로  행거가 있는데, 카메라는  행거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아마  째려나, 스무 게 남은 필름을 품고 그림처럼 벽에 붙어 다.


올 초 스스로에게 퇴사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여태 생각도 안 해본 것을 갖고 싶었는데, 같은 촬영팀에 있던 동생이 카메라가 어떻냐고 했다. 그래서 처음엔 디지털카메라를 보다가, (자칭) 아날로그 인간이니까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야겠다 다짐했다. 그렇게 NIKON FM2를 갖게 되었다. 수동 카메라는 처음이라, 초점을 맞추고 주변 밝기에 따라 이거 저거 조율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렇게 필름을 몇 통 써보니,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고 좋은 취미가 되었다. 그런데 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벽에 걸린 신세가 되었나.


가을이 오면 하늘이랑 낙엽이랑 반려견이랑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필름에 담고 인화해야지 다짐했었다. 그런데, 막상 손에 더 빨리 집히는 것은 휴대폰이었다. 보이는 대로 죽죽 찍어댔고, 그러다 별로면 지우고. 찍고 지우는 게 쉬우니 자꾸만 휴대폰 카메라로 손이 갔다.


필름 수동 카메라는 굉장히 무겁다. 철 덩어리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걸 들고나간다는 뜻은, 무언가 제대로 찍고 오겠다 라는 다짐이 서려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막상 다짐하며 카메라를 들고 간 날은 그렇게 많이 찍지 못했다. 무겁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마다 생각했다. 아끼다 똥 된다. 제발 찍자! 휴대폰 카메라처럼 그냥 찍으면 되는데, 필름에 남는 건 괜히 소중해야 할 것만 같고, 괜찮은 것이어야만 할 것 같아서 아끼고 아끼게 된다.


자꾸만 더 소중한 것을 찾으려다가, 결국 아무것도 찍지 못한 나를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계속 더 나은 걸 찾으려고 내 삶의 소중한 순간들을 못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둘러보면 특별하지 않더라도, 소중하고 예쁜 순간들이 참 많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조만간 카메라를 들고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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