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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영 Feb 23. 2022

10. 엄마와 딸의 대화



                                                                      1


  엄마 화장터다.


  이제는 엄마와의 인연이 끝났다. 축하하려는가 벚꽃이 일찍도 피어서 지랄 맞게 화창하다.


  나와 엄마는 물과 기름, 쇠와 나무로 도저히 섞이지 않는 존재였다. 이 둘이 부모 자식으로 만났고 생물학적으로 한 몸이라 뗄 수도 없고 본능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들이 나왔다. 나는 길게 세세히 표현하면 엄마는 한마디로 조졌다. 나는 화가 날 때마다 표현을 해야 마음이 풀렸는데 엄마는 입을 꼭 다물고 무시로 대응하셨다. 나는 직설적이고 당당한 사랑의 표현을 좋아했지만 엄마는 에둘러 말하고 찔러보아서 간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표현을 사용하셨다.

                                

  우리 사형제가 아주 어릴 때 엄마는 겨울이면 동상 걸린 발에 실을 칭칭 감고 바늘을 찔러 피를 빼곤 하셨다. 그 장면이 어린 나에게는 기괴하면서 끔찍했다. 바늘을 푹 찌르면 시커먼 피가 휴지를 가득 적셔서 충격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가 하는 대사가 있다.

“너희 내 말 안 듣고 속 썩이면  찔러서 피 낼 거다”

그러면 큰 남동생과 여동생은 자지러지게 울고 갓난쟁이 막내는 아무것도 모르고 누워서 형들이 우니까 따라 울고 온 집안이 난리가 난다. 나는 엄마의 속이 다 보여서 말똥말똥 눈알만 굴리고 쳐다보지도 않는다. 엄마는 내 쪽을 한번 쳐다보고

“나영아 네 엄마 말 안들을 꺼가. 엄마 찌른다” 한다.

 나는 “ 마음대로 해라 ”하고는 못 본 척한다.

엄마가 바늘을 찌르고 피가 콸콸 나오면 큰 동생은 자지러지게 울면서 빈다

“ 엄마 내 말 잘 들을게 그러지 마요”

그런 식으로 자식의 사랑을 시험하는 엄마가 내 눈에는 유치하고 나를 아이같이 취급하는 것 같아 방문을 휙 열고 나와 버린다. 그러면 엄마는 큰 동생을 안고

“아이고 우리 새끼 이리 오너라”

하시고는 안아서 달래주신다. 그리고 나 보고는 인정머리 없는 년이라 하셨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까지 엄마의 직장 때문에 할머니가 나를 키우셨다.  엄마와의 기억은 막내 동생이 태어나고  직장을 그만두신 여덟 살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두 살 터울로 동생들 셋을 돌보시느라 나한테는 손길을 잘 주지 못하셨다. 늘 엄마의 사랑을 더 갈구했지만 한 번도 엄마에게 푹 안겨서 잠을 자거나 치맛자락을 잡고 다닌 적이 없다. 늘 어린 동생들의 몫이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나는 엄마에게 많이 대들었다. 사사건건  말대꾸했고 엄마는 나를 무시함으로 대처하셨다.  동생들을 더 사랑한다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반항함으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남동생들이 크면서 말썽을 피우면 늘 전전긍긍하시는 엄마의 모습이 싫었다. 아들이 결혼하자 며느리를 나보다 더 챙기는 엄마에게 서운했다.  친손주 앞에서는 당당하게 외손주인 내 아들을 제대로  안아 주지 않는 엄마의 가식이 우스웠다.  종종 너는 잊어버렸다는 말이 듣기 싫었다.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었겠지만 왜 나도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걸 모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에게 왜 나 보다 동생들을 더 사랑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엄마의 대답은 “ 열 손가락 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너도 부모가 돼 봐라”였다. 나는 아들 하나만 있어서 그 말의 의미를 알 기회가 없이 살았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이 되어 버렸다. 엄마에겐 걱정할 것이 없던 큰딸이 어느 날 혼자가 되자 엄마는 그때부터 염려와 기도와 관심의 대상을 나로 정했다. 멀리 합천에 이사 가셔서 살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바리바리 해서 대구 우리 집으로 가지고 오셨다. 나는 나에게 갑자기 관심이 집중되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칠십 년을 안 하던 행동을 하니 받기도 불편하고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염려하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내가 부모의 자랑거리가 아니라 아픔과 수치가 되었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여러 번 거절을 해도 변함없이 가져다 나르는 반찬에 나는 분노하기 시작했다. 나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감정을 소중히 여기는 그 고집스러움이 화가 났다. 내 존재를 불쌍히 여기기 보다 나의 선택을 인정해주고 내가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을 믿어주기를 바랐다. 내 삶을 응원하고 너의 모든 선택이 최고이며 존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줄 아시니까 몰래  다녀가시곤 했다. 늦게 일을 마치고 오면 청소와 설거지 빨래까지 해놓고 가시는 노모의 흔적을 나는 종종 발견하곤 했다. 나의 말을 전혀 귀담아듣지 않는 것에 더 화가 나서 전화를 해서 퍼붓곤 했다. 그러고 나면 죄책감이 한 바지 몰려와서 더 괴로웠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면 다 후회할 짓인데 안 이래야지 하면서 또 변함없이 반찬을 싸들고 오는 엄마를 보면 화부터 올라왔다. 나 자신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분노가 올라왔고 서러움과 한의 덩어리를 엄마에게 쏟아부었다. 엄마는 묵묵히 받아주셨다. 그리고 다 잊어버렸다는 듯이 철이 바뀌고 제철 나물이 나오면 또 반찬을 들고 합천에서 버스를 타고 힘들게 들고 오셨다.  



                                                                 2



  나에게는 자식이 넷이 있다.


  딸 아들 딸 아들 두 살 터울의 환상적인 조합이다. 그리 큰 욕심을 내지 않은 딸들은 대학도 가고 때 되면 지랑 맞는 짝을 만나 자식 낳고 잘살아 주어서 늘 고마웠다. 두 딸이 미국 가서 유학한다고 칠팔 년 살 때는 업어 키우던 첫 외 손자도 보고 싶고 둘째 딸 산후조리도 해주고 싶었는데 나 없으면 잠시도 안 되는 별난 남편에 시어머니 눈치에 쉽게 가볼 수 도 없었다.


  큰딸은 어릴 때부터 눈치도 빠르고 지 할 일은 알아서 잘해서 유독 안심이 되었다. 가끔 똑똑한 척하고 내 품에 폭 파고드는 맛은 없었지만 신앙생활도 잘해주고 늘 든든했고 내편이라 생각하니 의지도 많이 됐다. 내 자부심이었고 어디 가든 자랑하던 딸이었다. 그런데 인생이 늘 한결같지 않은지 그 딸이 늦은 나이에 혼자되었다. 심장이 안 좋아서 늘 우야노 걱정했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위니 내 딸 간수는 잘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혼자가 된 딸을 보니 도저히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내 딸한테 생겼다 싶으니 밤에 잠도 잘 안 왔다.


  아들자식 하나 먼저 보내고 가슴에 묻고 나니 그래도 저렇게 건강하게 내 앞에 살아 주는 게 어딘가 싶다가도 앞으로 어찌 혼자 살아갈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났다. 죽은 아들은 하루도 잠시도 생각 안 한 적 없고 어떨 때는 뒤따라가고 싶다가도 혼자된 큰 딸이 걸려서 마음을 달리 먹곤 했다. 저것이 나까지 없으면 누구 의지하고 살겠나. 하나뿐인 자식마저 아프고 정신없어하는 딸을 보니 나는 가슴이 저 지옥 바닥까지 쿵 떨어지는 심정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딸은 나에게  섭섭한 게 많은가 보았다. 한 번씩 나한테 울면서 화를 내는데  오죽하면 나한테 그러겠나 싶어 섭섭하지만 한 번도 내색을 안 했다. 다른 자식들은 다 울타리가 있어서 별 걱정이 안 되는데 저거는 몸도 약하고 자존심도 세고 정도 깊은데  내가 죽으면 어찌할꼬 하는 생각뿐이었다.


  합천에서 사는 동안 시장에 가서 나물거리 보면 큰딸 생각이 나서 무치고 지 좋아하는 봄김치 담아서 다리가 아픈 거 남편한테는 괜찮다 하고 시외버스 타고 두 시간 걸려 딸네 집에 반찬을 풀어놓으면 마 반갑게 고맙다 하고 받아주고 내 앞에서 몇 숟갈이라도 먹어주면 고마 울텐데 반찬은 열어보지도 않고 왜 가져왔냐고 성화를 버럭 다. 무안하기도 하고 속도 상하지만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화가 난 마음은 다 없어지고 지가 얼마나 힘들면 나한테 그러겠노 내가 다 받아줘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딸이 없을 때 몰래 가서 갖다 놓고 간 김에 청소도 빨래도 해주고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딸은 갈수록 싫어하고 화를 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섭섭하고 다시는 안 해 준다라고 결심했지만 또 마당 한구석에서 커는 부추와 상추와 고추를 보면 딸 생각이 나고 내 마음과 달리 손이 만들고 발이 달려갔다. 이 정도면 나도 병이다.


  이제 내 몸에 파킨슨이 심해져서 지팡이를 안 짚으면 잘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넘어지면 안 돼서 딸이 사준 운동화를 신고 지팡이는 꼭 가지고 다닌다. 이제는 손이 떨리고 간도 잘 못 맞추어서 음식은 못 갖다 주지만 같이 한 번씩 밥 먹자고 해서 얼굴을 본다. 지가 바빠서 잘 못 오니까 내가 밥을 사겠다고 불러내면 손자 데리고 나와주니까 고맙다. 내가 더 살아서 저 큰딸 웃고 행복한 모습 보고 가야 할 건 데 왜 그 딸 걱정은 내 가슴 속서 안 없어지는지 모르겠다.



                                                                       3


  엄마가 죽던 날 화장터 이른 벚꽃이 합천 벚꽃 백리 길에서도 피어 참 예쁘게 나폴 거리고 있다. 합천 추모 공원 안치된 엄마는 아버지와 나란히 함께 있다.  언제나 없는 자식을 그리워하고 아픈 자식을 더 챙기셨는데 그곳에서 먼저 간 남동생을 만나 행복하게 웃고 계시겠다. 그러나 엄마의 성정을 아는지라 그곳에 함께 없는 자식 손자들 생각을 또 하고 계실 것 같아 엄마 환갑 때 모두 모여 찍은 사진을 갖다 놨다. 이제는 다 함께 모여 웃고 있으니 참 행복하시겠다

                                


절규



새끼야

내 새끼야

열두가닥 새끼줄 꼬아서 만든


하늘을 따다 주랴

바다를 퍼다 주랴

이몸 가죽 홀랑 벗겨

가죽신이 되어주랴

억장 무너질 때 두드리는

네 북이나 되어주랴


열 두 가닥 목숨줄 꼬아서 만든

새끼야 내 새끼야


네 새끼 새끼 잇는 매듭이 되어주랴


깊은 계곡 건너갈 때

출렁다리나 되어주랴


- 나의 어머니시인 김원자께서 쓰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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