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나영 Feb 22. 2022

9. 집으로 오는 길



   두 달 전부터 걸어서 퇴근한다.


   집까지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저녁에 선선한 바람 속에서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밤길을 걸으면 낮에 쌓인 스트레스나 우울한 생각들이 줄어들고 밤잠을 푹 잘 수 있어서 참 좋다. 오늘도 학원 문을 잠그고 길을 나서 걷기 시작한다. 범어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서있다. 아무 생각 없이 옆을 둘러보는데 엄마와 너무 닮은 분이 서있다. 그 연세에 제법 큰 키다. 살짝 곱슬 거리는 머리는 거의 백발이 다 돼가는데 싱싱한 머릿결과 어울리니 멋있다. 눈매는 외겹에 끝이 길게 뻗어서 살짝 쳐져있고 그 속의 까만 눈동자에서 단호함과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깨끗한 피부가 잘 가꾼 듯 검버섯 하나 없다. 회색 꽃무늬 리넨 셔츠에 하얀 면바지 흰 운동화가 화사하면서도 깔끔하고 우아하게 보인다. 꼿꼿한 허리에서 온몸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엄마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저 분보다 더 곱고 우아하고 아름다우셨는데 큰 동생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셨다. 아들을 잃은 충격 때문인가 파킨슨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허리도 굽고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혼자 감당하기 힘드시자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다. 아프지만 않으셨으면 저분 보다 더 멋있게 나이 드셨을 건데라고 생각하니 속이 많이 상한다.



   대봉교를 지난다. 다리 위는 바람이 더 시원하다. 바람이 끈적한 땀을 스쳐가니 마음도 몸도 한 숨을 쉰 듯 편안하다. 초여름 저녁의 선선한 강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이 신천강변을 따라 걷고 있다. 저 멀리 신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이 보인다. 엄마는 시인이시다. 시집을 내고 등단하시고 작품을 종종 문예지에 실으셨다. 한 오 년 전쯤 인가 신천에 있는 다리에서 작품전을 하신다고 나를 초대하셨다. 근무시간이랑 겹친다고 안 갔다. 사실 번거롭고 귀찮기도 했다. 나중에 꽃다발 들고 있는 동료 시인이랑 찍은 사진을 보면서 엄마 손에만 없는 꽃다발에 많이 죄송했다.

  

  엄마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는 걸 싫어하셨다. 우리는 늘 당당하고 당연하게 요구하는데 엄마는 그러지 않으셨다. 자식 눈치 보고 용돈을 드려도 기쁘게 당연히 받기보다 미안해했다. 무서운 시집살이와 별난 남편에게 눌러 자기 목소리 제대로 못 내고 사셔서 주눅이 들어서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를 더 쉽게 함부로 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왜 안 왔는지 묻지도 않으셨지만 살아 갈수록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든 다. 나중에라도 혼자 가서 엄마 시 앞에서 인증사진 찍어서 늦게라고 갔다 왔다고 보여드려야 되겠다.



  대백 플라자를 지난다. 오늘따라 계속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운전하고 다닐 때는 이렇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는데 걸으니까 새록새록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아까 횡단보도 앞에서 뵀던 그분이 엄마의 생각에 불을 붙인 듯하다. 엄마 오십 대 초반에 내가 결혼을 했으니까 벌서 오래전일이다. 그때는 대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백화점이었고 주변에 혼수와 예단하는 고급 가게들이 많았다. 엄마는 결혼을 앞둔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오셔서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많이 준비해 주셨다. 아직도 그때 한 이불들이 내 장롱 안에 있다. 여름에 모시이불, 겨울에 실크 양모이불, 봄가을 차렵이불 철철이 웬 이불들을 그렇게 많이 해주셨는지. 아직까지 사용하고 보관하고 있는 값진 그릇 들은 다 엄마 덕이다. 본인을 위해 그렇게 비싼 물건은 사지 않으시던 분이 딸들에게는 왜 그리 바리바리 좋은 것을 해주셨는지 모르겠다. 아마 엄마의 신혼이 너무 보잘것없어서 딸에게는 잘해주시고 싶으셨을지도 모른다.


   이불 한 채도 못해가고 달랑 몸만 간 시집.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같이 잠을 잤다고 하셨다. 부끄럼 많던 새색시에겐 시동생 시누이 시모와 같은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했으니 많이 힘드셨을 거다. 그릇 수저 하나 제대로 없어 항상 나중에 따로 밥을 먹어야 했던 것들이 엄마 가슴에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나 보다. 엄마의 정성에 비하면 나의 결혼생활은 그리 해피 앤딩이 아니라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건들 바위를 지난다. 명덕 로터리를 지난다. 명덕 로터리 근처에는 엄마랑 가던 맛집이 많다. 생선찜 집 칼국수 집 등이 생각난다. 안 가본 지 너무 오래됐다. 아직도 있으려나 싶다. 그중에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시던 곳은 일식 초밥 집이었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자란 엄마는 초밥을 많이 좋아하셨다. 종종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아버지와 함께 온 식구가 외식을 하곤 했으니 꽤 오래된 집이다. 그때는 새색시였던 주인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한 노년이 된 세월 동안 우리의 추억이 그대로 있는 집이다. 엄마와 나는 일 년에 두어 번씩 생일이 되면 가곤 했다. 엄마가 꼭 돈을 내시고 생일 밥을 사주셨다. 두어 달 전에 통화하면서 몸이 편치 않다던 엄마에게 좀 좋아지면 초밥 먹으러 가자고 했는데 아직까지 가지 못했다.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도통받으시지를 않는다.



  계명대 사거리를 지난다. 엄마가 합천으로 이사 가실 때 한 육십이 갓 되셨나. 엄마는 중도에 포기한 대학을 다시 시작하셨다. 스무 살에 아버지와 만나 결혼하시고 나까지 태어나자 대학 1학년이던 엄마는생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셨다. 국가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셔서 십여 년을 세무 공무원으로 근무하셨다. 마치지 못한 공부를 많이 내내 아쉬워하셨는데 결국은 60이 되는 나이에 계명대학교 평생교육원 국문과에 편입을 하셨다.


  일주일에 세 번씩 합천에서 버스로 다니시며 그렇게 삼 년 정도를 공부하시더니 결국 졸업장을 따내셨다.  너무나 즐겁게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셨고 가끔 시험 점수와 교수에게 칭찬받은 이야기를 자랑하시면서 뿌듯해하셨다. 신명여고 교복을 입은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단아하고 이지적인 훤칠한 모습의 소녀가 있다. 그 소녀가 못 다하고 가슴에 품었던 꿈을 이루어낸 것이다. 나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그런 엄마가 멋있었다.



  이제 집에 거의 다 와간다. 저기 내 막내 동생이 태어나고 우리 형제자매가 자란 추억이  묻어있는 나의 집이 보인다. 처음에는 단층 개량 한옥 집이었는데 아버지는 남동생들 결혼시켜 한집에 같이 살 욕심으로 집을 허물고 삼층 양옥 빨간 벽돌집을 지었다.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엄마 아버지가 사시던 3층에 내가 살고 있다. 내방은 엄마가 쓰시던 화장대와 장롱이 그대로 있다. 나는 가끔 안방 문을 열면 아버지와 엄마가 앉아 이야기하고 있을 것 같고 거실에 있으면  엄마와 같이 앞산을 바라보던 그때가 생각난다.



  오늘은 걸어오는 내내 엄마 생각을 많이 했다. 전화를 해도 계속 안 받으시는 엄마. 계속 음성 녹음만 남기고 끊는다. 내가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울면서 용서를 빌어도 대답도 안 하신다. 많이 삐지셨나 보다. 이번 일요일은 엄마에게 가봐야겠다. 엄마가 좋아하는 예쁜 꽃과 엄마 시 앞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엄마에게 보여줘야겠다. 그러면 엄마는 환하게 웃으시며 “우리 딸 왔나” 하시겠다. 그리고 엄마의 유골함 앞엔 사진이 또 하나 늘겠다. 

이전 08화 8. 장독 삼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