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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나영 Mar 22. 2022

6. 나의 일탈


  80년대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그 당시 나의 삶은 그 또래에서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해지고는 외출 불가였고 대학의 낭만인 엠티 미팅 등은 딴 세상 이야기였다. 저녁 7시쯤 퇴근하시는 아버지를 동생들과 일렬로 서서 반갑게 인사하며 맞아야 했고 청바지를 입어보는 것은 물론 금지였고 얼굴에 화장한 흔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엄마를 통해 꾸중이 내려왔다. 늘 치마에다 화장기 없는 밍밍한 얼굴로 다녔다.


  여름방학이 시작하고 한창 더울 때 친구가 삼대 삼 혼성 1박 2일의 거제도 여행을 제안했다. 그것은 나에게 지니의 요술램프에게 빌어야 할 주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나의 가슴에는 청춘의 피로 끓어올랐다. 누르고 있던 낭만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싶었고 마침내 감히 가고야 말겠다고 결심을 했다.


  나름 용의주도하게 과에서 교수님들과 여행을 간다고 혹시나 허락을 구해보았으나 역시 “어딜 여자가 외박을 해”였다. 나를 대학에 보낸 건지 감옥에 보낸 건지 모든 것을 포기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그 순간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짐을 쌌고 몰래 집을 나와 친구들이 기다리던 서부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뒷일은 걱정하지 않을 만큼 나의 청춘은 나의 환경과 이성을 거부했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나를 던졌다.


  일박이일로 예정했던 여행은 의외의 일정 변경으로 부산을 들러 2박 3일이 되었다. 파김치가 되어 집 대문 앞에 서서 눈을 감고 닥칠 운명에 크게 숨을 들이켜고 일부러 당당한 모습으로 대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집안은 조용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모습은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느라 고개를 숙이고 계신 엄마의 뒷모습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불호령에 더 보태기가 안됐는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잡초만 뽑고 계셨다. 자식들이 아버지께 혼날 성싶으면 무조건 자식을 옹호하셨는데 이번엔 내편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고 아버지가 퇴근하시고 평소처럼 저녁식사를 마치시더니 안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아버지에게 가는 게 아니라 낯설고 무서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듯 떨렸다. 방에 들어서자 내 눈에 방바닥에 있는 가위와 기다란 회초리가 보였다. 머리를 깎이고 맞아야 할 만큼 내가 잘못을 했나 라는 생각이 들자 그 순간 내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보다는 모욕감과 분노였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무 말 없이 쏘아보는 나의 눈빛에서 아버지는 무언가를 읽으신 듯했다. 울면서 용서해 달라고 사정해야 할 놈이 의외의 모습을 보이자 화도 내지 않았고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아마 합리적인 아버지의 판단으로 나를 다른 식으로 대해야 할 것을 간파하신 듯하다. 며칠을 마음 졸였으나 그걸로 끝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첫 일탈은 이렇게 막이 내리는 줄 알았지만 반전이 있었다.


  며칠 뒤 엄마가 같이 간 친구들을 나 몰래 모두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물으셨고 친구들과 열심히 찍었던 추억의 사진 필름을 빼앗아 오셨다. 이 일은 그 친구들의 입을 통해 내 또래들에게 쫙 퍼졌다. 그 뒤로 아무도 나에게 놀러 가지고 하지도 않았고 데이트 신청하는 남학생도 없었다.

  지금도 그 친구들이 모이면 그 이야기를 한 번씩 한다. 나는 씁쓸히 웃을 뿐이다. 그 당시에 부모님이 왜 그러셨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업을 하시던 아버지는 동료 사업가들의 자식들의 떠도는 안 좋은 소문을 들으시고 우리를 단속하신 것 같다. 고이 시집보낼 때까지. 지금의 학생들의 자유롭고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꼰대 짓이었지만 그 당시의 대부분의 자녀들은 이러한 엄청난 인권유린과 간섭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아니면 나만 그랬던가. 하여간 같이 간 친구들의 부모님은 다 허락하셨는지 아니면 친구들도 거짓말이 용케 들키지 않았는지 아직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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