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와 잡채

by 밀리멜리

"너한테 먹을 걸 뭘 좀 해 줘야 할 텐데."

"아픈데 뭘 먹을 걸 해준다고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엄마 음식이 먹고 싶었다. 4년만에 한국에 왔는데 먹은 거라곤 냉장고에 놔둔 지 며칠 된 숙주나물 정도였다.


"이거 봐, 잡채는 먹을 수 있겠는데."


나는 환자 식단 레시피를 넘기다 잡채가 있는 페이지를 발견했다. 잡채, 맛있지.


"잡채 먹고싶어?"

"응."

"그럼 가서 재료 사와. 당면이랑 시금치."

"갔다 올게."


아직도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기가 많이 힘들다. 떠오를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내 마음 속에 커다란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에는 엄마라는 라벨이 붙어 있고, 나는 여전히 그 상자에 손을 댈 용기가 없다.


그렇지만 너한테 먹을 걸 해 줘야 한다는 말과, 잡채 먹고싶냐고 묻는 목소리는 기억이 난다. 아파서 힘이 없었지만, 내가 먹고싶다고 말하자 갑자기 생기가 도는 그런 목소리였다.


잡채를 만들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시금치를 삶고, 당근을 볶고, 당면을 삶았다. 엄마는 식탁 의자에 앉아서 내가 우당탕탕거리며 부엌을 헤집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거실에서 또 무슨 일로 짜증을 부리다가 버럭 화를 냈다. 분명히 돈 관련한 일일 거다. 아빠의 화는 일일히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당면을 끓이다 말고 아빠의 화를 달래주러 갔다가 별 소득 없이 기분만 나빠진 채로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불을 켜놓고 있었는지, 당면이 퉁퉁 불어서 떡이 져 있었다. 어떻게 살리겠다고 찬물에 씻고, 준비한 야채를 넣고 버무렸는데, 그래도 영 밍밍하고 맛이 없었다.


"아, 잡채 다 불어버렸어! 망했어."


아빠의 화가 전염되었는지, 나는 망한 잡채를 보고 분통을 터뜨렸다. 목까지 차올랐던 화가 결국 내 머리끝까지 뜨겁게 확 달아오른 느낌이었다. 잡채를 섞던 볼을 세탁기 옆에 내던져 버렸다. 이때의 기억은 드문드문하다. 나도 크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 것 같다.


엄마는 쓸쓸한 얼굴을 하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내가 내던진 잡채 볼을 가지고 들어왔다.


"참기름 가져와."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는 이런 엄마를 존경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회복시키는 사람.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엄마는 참기름을 붓고, 매실액과 양념을 넣고 잡채를 이리저리 섞었다.


"먹어 봐."


엄마가 손으로 잡채를 집어 내 입에 넣어주었고, 꽤나 먹을 만 하게 되었다. 엄마가 손수 만든 잡채보다는 한참 별로였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내가 망쳐버린 잡채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되살아났다.


"엄마, 이거 맛있네."

"그래, 멀쩡한 걸 왜 버리려고 해."


퉁퉁한 당면을 삼키면서 울다가 웃었던 것 같다.


그게 엄마의 마지막 음식이라는 걸 알았다면 나는 그렇게 화내지 않았을 텐데. 그때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나는 아직까지도 잡채를 먹을 수 없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엄마가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