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천장을 물끄러미

깰 수 있을 것 같은데?

by 재룬

그렇게 나는 보너스 목숨으로 다음 스테이지에 계속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순간들이 원래 없었던 거라 생각하니 뭐든 소중하고, 마냥 즐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연말연시였고, 신임하사는 이제 2년 차로 접어들었다. 이제 아는 선배들도 좀 생겼고, 후배도 왔고, 천천히 올라오던 기량에 어느 정도 경험도 부여되자 슬슬 굵직한 임무들을 맡기 시작했다. 2022년은 새해부터 바빴다.


내가 있던 팀은 장교와 부사관이 1명씩 짝을 이뤄 임무를 했다. 마치 <디지몬 어드벤처>에서 태일이 아구몬의 관계랄까. 암튼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다양한 임무에 투입되자, 기존의 부사관 단위에서 형성되었던 인맥이 장교까지 이르며 인간관계가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아는 사람이 많아지자, 어떤 사람과 함께 임무를 하든 좀 더 편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 큰 건을 하나 맡았다.


보통 적당한 규모의 임무는 길어봤자 몇 시간 남짓이며 그날그날 당일에 끝난다. 근데 이번에 맡은 건 1년에 단 2번뿐이며, 오전 오후 내내, 총 5일로 계획된 대규모 임무였다.


임무에 참가할 4명이 결정됐다. 명단을 보니 준위 2명, 중사 1명, 그리고 나. 흠.. 불안한 마음에 관련 문서들을 꼼꼼하게 읽으며 준비했고, 최대한 상상해 봤다. 그리고 이번에 함께하는 분들을 쫓아다니며 최대한 예방주사를 맞아보려 했다.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이게 안 해봐서 지금 불안할 수 있는데, 첫날 한 번만 해보면 감이 딱 거라고. 미래를 잠시라도 훔쳐보고 싶었으나 당장 손쓸 수 있는 건 딱히 없나 보다. ..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렇게 잠을 뒤척인 월요일.

5일간의 대장정이 시작됐다.


나는 중사 선배와 함께 임무를 준비하러 일찍 출근했고, 곧이어 준위님들이 한 손에 커피 하나씩 들고 등장하셨다. 다들 여유만만시네.. 이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인가?


그렇게 임무지역으로 전투기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아주 계획대로 된 편조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긴박한 상황으로 빠진 편조도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럼에도 준위님들과 선배는 오더가 명확하고 간결했고, 난 따라가기도 벅찼다.


진 빠지는 하루였다. 첫날 해보면 다 알게 된다는 뭔 말인지 알겠다. 이게 생각한 대로 안 되는구나? 최소한의 도상만 그리되 나머지는 현장에서 상황을 잘 파악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계획은 물론, Plan B까지 잘 알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화요일부터는 그 '기계획'에 혈안이 되지 않도록 유의했고, 임무에 필요한 본질만 딱 파악하고 나머지는 그때의 공중상황과 조금의 순발력에 맡겨보는 걸로. 대담하게 마음먹자 강박이 좀 줄었다.


수요일.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정말 시작하고 나니 시간이 정신없이 흘러 어느덧 이 레이스의 절반을 지나고 있었다. 가만 보면 모든 일이 다 그렇긴 하지. 어쨌든 어제까지는 준위님들의 오더를 따라가기 바빴는데, 이게 셋째 날이 되어서야 드디어 나도 한 건 올렸다.


모 편조에서 비상 상황이 생겼는데, 작전실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이걸 캐치한 것이다. 침착하게 절차대로 보고를 하니 팀장급에서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주변 관제기구와의 신속한 협조 하에 해당 전투기는 최인근 기지에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일단락되자 지휘부에서 세부내용 파악을 위해 우리 자리로 전화를 걸어왔고, 옆에 계시던 모 준위님께서 일목요연하게 앞뒤 상황을 정리해 보고하셨다. 그 통화 말미에


네, 네. 저는 그때 잘 못 들었는데 옆에 이 친구가 잘 들어줘서 ㅎㅎ 그래서 빨리 끝낸 겁니다.


물론 가장 놀랐을 사람은 조종사고, 그런 상황에서도 멘탈 잡고 침착하게 착륙한 조종사의 공이 가장 크다.


나는 조금의 도움을 보탠 것뿐이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됐지만, 평소 기라성처럼 느껴졌던 계급인 준위님에게 작은 인정을 받게 되자 죽은 줄 알았던 내 안의 그 고래가(12화 참조) 소리 없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기분은 좋았지만 비상 상황이었으니 표정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러나 조용히 올라가는 어깨는 도무지 어쩔 도리가. 이제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었다. 그 자신감은 말로 표현 못 한다.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그렇게 귀밑까지 올라온 어깨로 목요일을 견디고 맞이한 금요일. 지난 월요일 아침에 '아.. 이 세상에 금요일이라는 게 또 올까..?'라는 의구심을 품었던 그 끝이 드디어 보인다. 보람 차지만 슬슬 그만하고 싶은 그 기분..


어쨌든 이번 주 내내 날씨도 잘 따라주어 대부분 정상 임무를 했고, 중대한 이슈도 없이 여기까지 잘 왔다. 그러다 준위님 중 한 분이 오늘 마지막 날이니까 나에게 이쪽 자리로 넘어와 보라고 하셨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원래 중사 선배가 메인으로 임무를 하는 자리를 맡았고, 나는 그 주변에 접근하는 항공기들을 통제하는 자리였다. 근데 나보고 중사 선배의 메인 자리로 와서 한 번 해보라고 하신 것.


이런 거 아무나 안 시켜줘~

될 거 같으니까 시켜보는 거야~


부담스러웠지만 '될 거 같으니까' 그 말에 용기가 솟았다. 지난 4일 동안 중사 선배의 어깨너머로 배웠던 것들을 떠올리며 집중했다. 정확하게는 선배를 흉내 냈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아직은 그런 짬이었으니까.


긴장해서 하얗게 질린 손을 벌벌 떨며 마지막 편조까지 임무를 마치고, 지난 일주일 간 이어 온 이 대규모 훈련도 종료되었다. 다들 동시에 일어서며 서로 수고했다는 말을 연신 주고받고, 웃으면서 자리를 정리했다. 나는 이런 순간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게 또 나아가는 힘이 되니까.


보통 게임 속에서 덩치가 큰 몬스터를 잡으면 많은 경험치를 한 번에 얻는데, 그때가 딱 그랬다. 선배를 따라 큰걸 한 번 맡아보니, 잘 끝낸 대규모 임무 속에는 챙겨갈 전리품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소중하게 하나씩 주워 담았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으리라.


그 일주일 전후로 나를 찾는 사람들이 종종 생겼다.


김 하사님? 다음 주에 ○○ 임무 같이 해요. 아직 아무도 얘기 안 했죠? 오케이. 저랑 하는 걸로!


이렇게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기도 했고,


앞에 가면 신임소위 분 계시거든?

처음이시라니까 네가 좀 가줘라.


이렇게 새로 오신 분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도 했다.


반년 전, 잔뜩 찌그러져 눈알만 바쁘게 굴리던 내가,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조금씩 여기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있었고, 자존감이 천장에 다다른다. 무엇보다도 장교분들이 나를 찾아주실 때가 가장 기분이 좋고 설렜다.


그래서 나는 더욱 도움이 되고자 했다. 옆에 멀뚱멀뚱 앉아서 시키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적극적으로 추천해서 옆에 앉은 분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리고 그 긴박한 찰나에도 선택지들의 장단점을 치열하게 논의하여 하나씩 함께 결정해 나가는 게 재밌었다. 하루 종일 그러면 지치기도 했지만, 함께한 분들의 '수고하셨어요~ 고마웠어요~' 그런 한 마디면 체력은 다시 풀로 충전됐다.


또한 작전 외적으로도 가끔 소위 분이 너무 긴장하고 계시면 그 경직을 좀 풀어드리고자 정신 나간 개드립으로 웃겨드리곤 했다. 그것도 주요 업무다. 내 옆사람이 쫄면 나도 쫄리니까. 암튼 그렇게 임무가 잘 끝나면 나도 좋고, 입소문도 타고, 그러면 좋은 기회가 또 생기고. 꿩 먹고 알 먹는 선순환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찰떡같이 100% 맞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때로는 의견이 갈리기도 했는데, 그 리스크에 대해 설명을 해드려도 받아들이시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면 좀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 가끔 기량이 덜 올라온 분과 함께 할 때면 아무리 차근차근 조언을 해도 실행하지 못하는 분도 있어 곤란했다.


왜냐하면, 혼날 땐 같이 혼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방금까지 2인 3각으로 뛰다가 '전 할 거 다 했는데 이 분이 못한 겁니다' 하고 척지며 책임에서 쏙 빠질 순 없지 않은가.


부들거렸지만, 내 잘못이 아니어도 눈 깔고 죄송하다고 할 줄 알아야 했다. 억울함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이 있더라도 삼킬 줄 알아야 했다. 일 열심히 하고도 욕먹는 기분은 참.. 작전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나도 사람이다 보니 이런 게 반복되자 생각이 많아졌다. 다름 아닌 나의 신분 자체에 대해서.


장교와 부사관, 각 신분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있다. 부사관은 장교를 상급자로서 존중해야 하는 게 맞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다. 물론 그 반대도 그렇고. 잘 알고 있지만 가끔 이해가 되질 않는 억울한 일들을 겪으니 그 관계가 좀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불려 가야 되지?

내가 왜 죄송해야 되지?

아니, 진짜, 정말, 도대체.


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답답함에 탁해진 한숨을 길고 깊게 뿜어낸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가로막혀있지만, 그 위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부사관이라는 신분에도 천장이 있다. 그 무렵 내게 그건 하나의 '유리천장'이었고, 그 너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꽁꽁 두드려 보니 뭐 딱히 견고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다 중얼거린 외마디.

깰 수 있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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