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끝났어야 했던
25년 남짓했던 삶.
세상에 두 장 짜리 작별을 고하고
몸을 살포시 기대어 눈을 감았다.
죽기 직전에 주마등처럼 살아온 순간들이 스친다더니, 그런 건 모르겠고 지글지글 무언가가 눈앞에 진동을 한다.
겪어보지 못한 고통에 본능적으로 몸부림쳤다. 눈을 떠보니 아지랑이가 피어 시야가 일그러져 있었다.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잠시 뒤 정말 죽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아지랑이는 더욱 격해졌다.
그 순간, 아이러니였다.
나는 살고 싶었다.
모든 걸 비우고 죽으려 했는데 극심한 고통 끝에 생명을 잃어가던 단전 아래서 토하듯 올라온 한 마디는 '살려줘'였다. 너무 아팠다. 그러자 아프기 싫었고,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발악을 다 해 몸부림쳐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났다.
본능이다.
나는 살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은 죽으려 했을지언정, 내 몸은, 이 육체는 계속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호흡이 느려지고, 심장이 진정되고, 혈액은 질서 있게 부지런히 온몸을 돌았다. 계속해서 차분하게 멍을 때렸고, 이내 정신이 맑아졌다.
사고사례와 뉴스에서만 보던 '20대 초급간부, 숙소에서 극단적 선택 시도'를 방금 내가..
어쩌다 본능대로 살아나버렸다. 죽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진짜 엄청 아파서 다시 시도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아픈 게 싫어서 죽지도 못하겠고 의도치 않게 숨통이 계속 붙어있게 되었으니, 이제 뭘 해야 하지?
질서 정연하게 세상으로의 로그인이 진행됐다.
음.. 뭘 묻고 앉았어. 일 해야지.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데, 당연히 살아서 일하는 게 낫지.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 임무 관련 규정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정말 갑자기. 그때 시계는 새벽 4시였다.
정말 의도치 않게 다음 출근을 해버렸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작전실도, 사람들도 모두 그대로였다. 나도 겉보기엔 이전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허둥지둥.
한 가지 옥에 티가 있다면, 그 새벽에 있었던 일로 인해 목에 불긋하면서도 어둡게 푸른 띠 모양의 멍이 들었다는 것. 옷깃 쪽 부근에 난 상처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것. 실제로 아무도 몰랐다. 동기였던 동생 한 명 빼고는.
동생이 다가와 '형.. 목에 그거..' 하며 지 혼자 심각하게 나를 쳐다봤다. 순간 그게 너무 웃기고 고마워서 오히려 내가 그 동생을 달랬다. 혼자 안고 가려하지 말고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란다. 눈물이 핑 돌 뻔했으나 동생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신박해 웃음이 났다.
그래, 힘든 거 티도 내고 어디 좀 기대도 된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겐 그런 사람들이 충분히 많았다. 온 사방이 선배였으니까.
아무리 교육생 때 날고 기었어도 나는 영락없는 막내다. 깨지고 부딪혀 쓰러져도 손 내밀어 일으켜줄 사람이 많았다. '1등 하고 왔으니 다 잘해야 해'라는 건 멍청한 생각이었다. 그래봤자 막내가 뭘 어쩔 건데. 뭘 할 수 있는데? 그걸 이제 알다니.
그렇게 원래 주검으로 발견되었어야 했던 날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했던 그날, 또 한 근무가 어찌저찌 끝나간다. 비련의 주인공 버프는 없었다. 여전히 잘 모르겠고, 어리버리하고, 죄송하기 바쁜 하루였다.
근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죽으려고 했던 순간 느낀 고통에 비하면 정말 1도 타격이 없었다. 다 포기했던 그 순간이 도로 도움이 되기 시작한 것. 정말,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지 못했다. 죽는 고통에 비하면 앵간해선 진짜 그냥.. 애들 장난이다.
허 참.. 정말 이런 거로 죽으려고 했다고? 장난하나. 스스로가 어이없었고, 자신감이 용솟음쳤다. 잘한 거 하나도 없었으면서 기세등등하던 나를 누가 불렀다. 1팀장님이 나를 찾으신다고.
그게.. 누가 떠들다가 그때 작전실에서 내가 울었다는 얘기가 1팀장님 귀에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고.. 작전실 소문 참 빨랐다. 또 누굴까. 한숨을 푹 쉬며 1팀으로 올라갔다.
어 그래, 김 하사. 울었어?
단도직입적이었다. 부정할 수 없이 선 채로 푹 푹 찔려야 했다. 예 뭐.. 그 조금.. 그런 사안이 있었습니다.. 하며 빙글빙글 꼼지락꼼지락 얘기를 돌려보려고 했다.
그러자 웃으시며 아무리 그래도 간부가 공적인 자리에서 감정을 그렇게 드러내면 보기 안 좋다고, 새로 맡은 직책 때문에 그런 거라면 정말 부담 가질 필요 없다며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선배한테 닦이듯이 배우면 재미없어~
가끔은 '내가 맞는 거 아니야?' 하고
오기도 좀 부려보고.
그리고 솔직히 이게 어렵냐?
여기 무슨 어려운 영어 수학 써?
내가 4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워딩까지 기억할 만큼 가슴 깊이 새겨들었던 말이다. 내 마음속 힘겹게 지켜낸 작은 모닥불에 좋은 땔감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석양이 지는 퇴근길. 터덜터덜 언덕길을 내려오다 하늘을 보니, 저녁노을을 가득 머금은 산등성이는 주홍빛으로 반짝였고, 그 반대편 하늘은 연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이 광범위한 빛의 그라데이션은 해 질 녘 이 순간만의 특권이다. 10분만 늦었어도 재미없게 어두컴컴했을 것.
지금 이 찰나의 기적 같은 순간, 나 또한 지난 새벽에 숨을 거뒀으면 보지 못했을 광경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기포 같은 무언가가 방울방울 올라온다. 배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으로 그 얼굴들을 들여다 그 이름을 보니, 그건 바로 행복이었다.
그때 고통을 몇 초만 더 참아버렸으면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이런 황홀경을 눈에 담지 못했겠지. 이런 행복에 취해 너털웃음 짓지 못했겠지.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을 못했겠지.
모두가 잠든 밤, 살고자 절박했던 몸부림. 그리고 생존. 참 잘했다 싶었다.
원래 끝났어야 했던 게임인데,
지금부터는 모든 게 기분 좋은 보너스 스테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