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저 비터

3번째를 향한 3점슛

by 재룬

땅은 이미 꺼졌고, 하늘도 꺼져라 한숨을 뿜어대다 물끄러미 올려다본 유리천장 위의 세상.


그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바로 '학사장교'라는 길. 공군 장교가 될 수 있는 입직 경로 중 하나인데, 학사 학위를 가진 채 나이 요건 등 조건만 맞으면 도전할 수 있다. 물론 현역 부사관 신분인 나도 지원 가능했다. 솔깃.

학사장교 카드를 쥐고 한동안 빙글빙글 골똘히 만지작거려 봤으나, 쉬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적응하느라 애쓴 것들이 아깝기도 했고, 지금 내 주변의 고마운 동료들과의 화목한 일상을 저버린다는 것도 아쉬웠다.


단순히 '한 번 해볼까?' 하며 지원하기에는 의무복무 기간, 최소 3년이 묶이는 것에 대해 쓰읍.. 좀 더 숙고가 필요했다. 20대 중반에게 3년이라는 시간은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일단 결심했을 때 학력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학위부터 준비했다. 자퇴했던 전적 대학교의 학점이 있었기에 학위를 따는 것 자체는 큰 부담이 아니었다.


꼭 장교로 가지 않더라도 어차피 부사관 장기복무 심사에 필요했으므로 겸사겸사였다. 교대근무를 하면서 퇴근 후에 학점은행제 강의를 듣고, 과제도 하고, 학점에 반영되는 시험도 시간을 쪼개어 보러 갔었다. 나름 꼼지락꼼지락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얼추 계획을 세워보니 내년 2월이면 학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고, 그러면 내년 3월에 입대하는 학사장교 기수에 지원할 수 있었다. 만약 떠난다면 대략 반년 뒤인데, 생각보다 빨리 떠나게 되는 셈이라 팀에 말씀드릴 거면 빨리 말씀드려야 했다. 깊어지는 고민에 침대에서 뒤척뒤척 몸부림이 심해졌다.


기웃기웃.. 갈팡질팡.. 오르락내리락..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었다. 어떤 날은 나의 일이 너무 보람차서 그대로 말뚝을 박고 싶었지만, 또 뭔가를 겪은 날은 그게 너무 싫어서 쒸익거리며 학사장교 모집요강을 들여다보고 앉았었다. 마치 직장인이 가슴속에 사표를 품고 살듯, 나는 장교 원서를 품고 살았다.


원서접수 마감일은 10월 첫째 주 금요일이었다. 내가 이걸 어떻게 정확히 기억하냐고? 아주 기가 막힌 스토리가 있어서. 잠시 마감일 직전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본가로 내려가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가장 편안한 곳에서 조용히 저 깊은 곳 나의 민낯을 들여다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나 자신과의 1대1 심층 압박면접이 시작되었고, 독한 질문들을 퍼부었다.


일에 치여 홧김에 현실을 도피하고자 장교를 들먹이는 건 아닌지? 도망가고 싶으면 부사관 신분 그대로 전역하면 되지 않나? 왜 굳이 장교로 가시려고? 그리고 당신, 20대 들어서 학교든 직장이든 뭘 2년 이상 하신 적이 없는데, 이제 정착 좀 하시죠? 철새세요?!


윽..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들에 중얼중얼 답변해 봤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 서고 싶어서? 더 많은 발언을 하고 싶어서? 단순히 더 높은 계급과 급여? 아니면 혹시 명예? ㅋ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고.


그럴싸한 말들을 떠올리다 '후회할같아서.' 그게 스스로에게 가장 설득력 있었다. 지원할 수 있었는데 간만 보다가 접으면 나중에 '아 그때 그냥 장교로 갈걸..' 그런 후회를 할 것 같아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자꾸 뒤돌아볼까 봐. 안 하고 후회하기보다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래, 지르자.



일단 전화부터 좀 돌리자. 시간은 요동치며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기에 서둘러야 했다.


가장 먼저 내가 신세를 많이 졌던 우리 팀 부사관 최선임인 상사 선배님께, 다음은 주임원사님, 마지막으로 소령이셨던 1팀장님께 학사장교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팀에서 특별히 해주실 건 없었지만 전화 거는 분마다 돌아온 답변은 하나같이 감사하게도 '그래, 내가 혹시 뭐 해줘야 하는 게 있을까?'였다.


시간이 좀 많이 촉박했던 게, 그 주는 월요일이 개천절이었고 수요일은 우리 전대가 휴무일이라 행정처리를 할 수가 없어서, 내게 주어진 시간은 화, 목, 금요일 단 3일. 그 안에 모든 서류를 구비해 공군본부로 등기우편을 보내야 했다.


개천절 연휴가 끝난 화요일. 아침부터 인사 관련 부서에 전화를 돌려 지금 상황을 설명드렸고, 다들 알겠다고 하지만 대부분 '하.. 그걸 지금 말씀.. 하시면..' 하며 곤란해하셨다. 바쁘신 와중에 짐을 더 얹어드린 것 같아 죄송했고, 그날은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보냈다.


수요일은 휴무일이라 어차피 부대 사무실에 아무도 없으니 최대한 부대 밖에서 챙길 수 있는 학위, 등본 등을 챙겼고, 이제 우편봉투에는 내가 현역이라 필요했던 사령관 추천서만 동봉하면 된다. 설마.. 목, 금 이틀 안에는 나오겠지..? 설마..


지가 늦게 지원해 놓고는 염치없지만 음이 급해 전대에 전화를 해보니 '글쎄요.. 사령부에서 아직 회신이..' 시간이 촉박해 사령부에 직접 전화..? 는 좀 그렇고 메일을 보내보니 '내일 중엔 나올 거예요'라고..


내일은 접수 마감일이라 불안한데.. 만약 금요일 당일에 어떤 이유로 추천서 처리가 지연되면.. 늦게 결정한 업보를 이렇게 받는 건가. 본인이 자초했기에 할 말 없는 상황. 입술이 바싹 타들어갔다.


최후의 금요일. 큰 게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하던 오후 3시쯤, 사령부에서 연락이 왔다.


사령관님 추천서가 잘 처리 됐는데, 이걸 전대로 다시 공람해 주고 접수해서 뽑아서 등기우편을 보내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리니까, 사령부에서 공군본부로 추천서를 직접 보낼 테니 지원자께서는 걱정 말고 나머지 서류들을 보내라고.


와.. 누가 군대 행정 느리다고 했나?


외마디 감탄과 쾌재를 부르며 당장 우체국으로 팔랑팔랑 달려갔다. 차가 없을 때라 말 그대로 진짜 달려갔다. 웃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내가 우유부단했던 탓에 주변 사람들까지 괜히 마음 급하게 만든 건 .. 나 한 명의 늑장지원으로 인해 덩달아 고생시킨 분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그러니 꼭 합격하고 훈련 잘 받아서, 중간에 잘못되는 일 없이 반드시 소위로 임관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진흙탕에 끌어들였으면 그 노력들이 허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겠지. 그렇게 장교가 되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급하게 쏘아 올린 포물선.

불안한 궤적이었으나 그 방향은 맞았다.


3번째를 향한 3점슛, 샷 클락은 0초.

버저 비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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