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적인 불규칙
항공통제 특기라면 피해 갈 수 없는 교대근무.
여기 교대근무가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다.
니들이 꿈을 꾸던 그 시간에 나도 꿈을 꿨지
두 눈 똑바로 뜬 채로
- 우원재 <시차> 中
밤을 새운다는 건 고된 일이다. 그러나 이 가사에는 '밤샘'이란, 고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나도 충분히 '꿈'을 꿀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있다. 눈을 감고 자는 사람들과 달리 두 눈을 똑바로 뜬 채로.
재입대를 한 뒤 3개월 간 후보생으로, 특기학교에서 초급과정, 대구에서 작전가능교육으로 4개월 간 교육생으로. 도합 7개월 간 항상 짜여진 시간표와 누군가의 관리를 받다가 드디어 일반인(?)이 된 것. 드디어 나도 출퇴근하는 직장인!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제 말로만 듣던 MCRC에서 교대근무를 시작한다. 내가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은 다음과 같았다.
MOR(모닝): 0730 ~ 1215
MID(미드): 0015 ~ 0730 * 밤샘
SWI(스윙): 1830 ~ 0015
AFT(애프터): 1215 ~ 1830
이렇게 3일 일하고 이틀 쉬는 5조 4교대 근무다. 미드와 스윙은 같은 날이므로 근무는 3일이지만 출근은 4번 한다. 독특한 구조다.
내 첫 출근은 애프터 근무였다. 첫날 끝나자마자 이틀 휴무가 바로 돌아오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왠지 '휴일 직전 근무니까 분위기도 화기애애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했다. 부디 가엾은 신임하사를 온정으로 품어주길 빌었다.
첫 출근 후 선배들에게 전략을 듣기도 했다. 밤을 새워야 하는 미드를 잘 견뎌내려면 낮잠을 잘 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일부러 모닝 전에 잠을 적게 잔다고. 극히 드물게 모닝 전에 밤을 새우고 오는, 일명 '쌩모닝'을 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는 모두 졸린 채로 출근하더라도 끝나고 바로 낮잠을 푹 자기 위해서다.
그리고 막내가 처음 왔을 때 고참들이 눈여겨보는 것이 있다고 한다. '과연 막내가 첫 미드 때 졸 것인가?' 이게 은근 중요한 첫인상 중 하나다. 막내가 미드를 뜬눈으로 말똥말똥 잘 견뎌내면 의지 있는 놈, 그렇지 못하면 정신무장이 덜 된 놈으로 비친다고.
병사 시절 당직근무도 꽤 서봤고, PC방 야간 알바도 뛰어봐서 밤을 새우는 데에 큰 두려움은 없었으나, 그 얘기를 들으니 살짝 긴장됐다. 잠이라는 게 내 마음대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크기 때문이다. 최대한 낮잠 많이 자고 가야지! 라는 생각뿐이었지만, 밤샘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낮잠은 언제 자고, 언제 일어나고, 밥은 언제 먹어야 적당할까? 근데 그 야밤에 식사는 어디서..? 해결해야 할 게 많았다. 당장 숙소에 조리기구가 없었으니 햇반에 냉동만두 한 봉지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고 첫 미드 출근을 했다.
방문을 나서보니 초여름이지만 밤 12시는 공기가 제법 찼다. 출근길에 보이는 벚꽃이 진 자리에 드리운 연둣빛 녹음(綠陰). 그 위에 돋아나던 새순은 이제 막 자리를 잡는 나를 닮아있었다.
자정.
엄밀히 따지면 사실 하루의 시작답게 실제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차갑게 식은 공기로 무겁게도 고요했던 브리핑실. 하나둘씩 비틀비틀 몽롱하게 모여들지만 그래도 일이 바쁜 시간대는 아니어서 그런지 마음은 여유로워 보인다.
나는 지난 근무 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우리 팀 감독관님, 주임원사님과 면담도 했고, 이어서 선배들이 앞으로 어떤 것들을 공부해야 하는지 로드맵도 제시해 주셨다.
지난 4달 동안 교육생으로서 어느 정도 성과도 이뤘으나 그건 '초급과정', '작전가능교육'이라는 이름 그대로 작전이 턱걸이로 딱 가능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즉, 작전을 제대로 하려면 한참을 멀고도 멀었던 것.. 가시밭길이 예고됐고,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다.
새벽 3시 정도까지는 낮잠과 커피의 효과로 큰 문제없었으나, 마(魔)의 4시부터는 머리가 멍해오는 것이 그냥 졸린 느낌과는 또 달랐다. 배가 고프긴 한데 입맛은 없다. 생각은 되는데 말은 어버버 꼬였고, 뭘 집중해서 읽어보려 해도 글자들이 두뇌를 단순 패싱했다. 밑 빠진 머리에 글자 붓는 셈.
그도 그럴게 지구 반대편에서는 누군가 일어나서 일상을 보낼 시간. 그 시간에 눈 똑바로 뜬 채 일하고 공부까지 하려니 그게 잘 되나. 최대한 정신력으로 버티는 거지.. 그러다 6시쯤 되면 생체리듬 덕분인지 또 정신이 얼추 돌아온다. 전반적인 신체기능이 좀 저하되는 기분이었지만 졸면 안 된다는 강박이 너무 강해서 꼿꼿하게 굳은 채 뜬눈으로 첫 미드를 견딜 수 있었다.
퇴근 후 작전실 밖으로 나오다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눈부셨나? 아침햇살이 그리도 따가운 건 처음이었다. 지하에 있는 우리 작전실이 은근 어둡구나.. 진짜 너무 밝아서 눈을 감은 채 언덕길을 걸어 내려왔다.
헤롱거리며 대충 씻고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이불 덮고 조용히 들어보니 어느 방에서는 출근 준비를 하는 듯했다. 헤어드라이기 소리도 나고, 신발을 신고 나가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도 나고. 휴게실의 전자레인지가 돌아가는 소리도 났다. 아마 아침밥인가 본데, 누군진 몰라도 건강하게 사시네.
남들 눈뜰 시간에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잠들고,
남들 자는 시간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 씻는다.
남들 일할 때 반바지에 슬리퍼 끌며 놀러 가고,
남들 놀러 갈 때 전투화 끈을 단단히 조여 맨다.
같은 공간, 그러나 시간대가 묘하게 어긋난 그 균열 속에 내가 있다.
근무시간이 불규칙해 보이지만, 조금만 크게 보면 이보다 더 규칙적일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하게 톱니바퀴가 부지런히 돌아간다. 정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각 톱니를 맡아 그걸 굴리고 있다.
절도 있는 저 톱니바퀴처럼 나 또한 불규칙 속에서의 일정한 규칙이 필요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흐름을 따라가기도 벅찼으니.. 뭘 먹고 몇 시에 자고는 그 당시의 내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규칙적인 수면과 균형 잡힌 식사. 건강의 기본 원칙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다들 일하는 날에 혼자 놀러 다니는 일탈 아닌 일탈 같은, 그런 휴일들이 주는 짜릿함에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출근해야 해서 일찍 잠들 때 새벽까지 유유히 놀다가 잠드는 우월감에 절어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졸리면 언제든지 생각 없이 침대로 몸을 던진 탓에 6시간 이상 숙면하기 어려웠고, 눈을 뜨면 10시간 이상 깨어있기 힘들었다. 수면패턴이 규칙이라곤 찾을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달았다. 그로 인해 식습관도 망해버려 공복임에도 위가 불난 듯이 뜨거웠다.
체력이 곧 정신력이라고 했는데. 몸이 망가지자 그게 곧 정신으로 이어졌고, 머리가 맛이 가자 마음까지 덮치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에도 크게 휘청이는 느낌, 그렇게 마음속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건 쉬어가는 그늘이 아닌, 나를 덮쳐오던 암흑이었다. 불규칙 속 규칙을 찾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