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취한다는 건
2021년 봄.
진주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당장 영화 배경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쏟아지는 벚꽃잎들을 가르며 커다란 버스가 쾌속질주한다. 신임하사들에게도 봄이 온 걸까? 바쁜 일정 속에서도 꽃구경 갈 정도의 낭만은 있는 걸까?
어림도 없지, 그건 대구기지로 향하는 군용 버스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장장 6개월 간 외출이 통제된 채 철저히 영내에서 교육만 받았던 우리의 첫 외출이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군부대 가는 게 첫 바깥 구경이었다.
초급과정을 마친 신임하사들은 이제 대구기지에서 실전능력 배양을 위한 4주간의 '작전가능교육'을 추가로 받는다. 어떻게 교육 이름이 작전가능? 떨어지면 작전 불가능인가?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다. 작전가능교육은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MCRC에서 진행된다.
지금 가는 곳은 이전처럼 교육부대가 아닌 현행작전부대였기에 몸이 뻣뻣해졌다. 우리를 환송해 주시던 교관님들도 거기 가면 온 사방이 다 너희 선임들이고, 신임하사는 걷는 폼만 봐도 바로 표가 나니 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하셨다. 착잡하네.. 달리는 버스 창가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갈구하던 바를 이루어 품 속에 학교장님의 대령상이 안겨 있었지만 지금부터 또 새로운 걸 배울 거고, 지금까지의 성적은 리셋되어 모두가 다시 같은 출발선에 놓이니 작은 영광에 취해 헤롱거릴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이번 교육은 1등에게 사령관님의 2스타 소장상이 주어진다. 진주에서는 장장 3달 동안 대령상 받을 자를 가려냈지만, 이곳 대구에서는 훨씬 짧은 1달임에도 상장은 훨씬 높은 2스타상이 걸려있었기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임을 예고했다.
이번에 1등을 못하면 지난 대령상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고, 역전당한 느낌이 들 것 같아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야구에 빗대자면 정규시즌을 우승해 놓고 정작 한국시리즈에서 패배한 느낌?
우리 항공통제 특기에서 시험을 친다라고 하면, 디테일한 암기력이 요구된다. 물론 이해를 기반으로 외워나가지만, 답안을 써낼 때는 최대한 원본과 똑같이 써내는 것이 유리하다. 특히 이번처럼 모든 문항이 주관식일 경우 더욱. 그래야 채점할 때 이견이 없다.
그래서 지난번과 유사하게 이번에도 괴이한, 아니 좀 더 괴랄한 발상을 했다. 단순히 '열심히 해야지'가 아니라 '교본을 통째로 외워버리면 1등이네?'라는 생각을 했고 그 각오는 '내 두뇌의 한계를 시험해 보자'였다.
08:00 ~ 17:00 동안 이어지는 수업과 실습 후, 저녁을 먹고 매일같이 야간에 자습을 하러 MCRC로 들어갔다. 심지어 체력단련이 있던 날엔 다 같이 격하게 풋살을 하고도 얼른 씻은 뒤 으스러진 몸을 이끌고 절뚝절뚝 공부하러 들어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직전에는 룸메이트가 취침 중이니 불을 켤 수가 없어 밝기를 줄인 핸드폰 메모장에 오늘 암기한 것들을 쭉 타이핑해 보고 기억나지 않는 키워드나 문구들은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교본을 꺼내서 '아~ 맞다~' 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러면 실제로 내 두뇌의 용량을 어렴풋이 측정할 수가 있어 웃겼다. 특정 페이지 수 이상을 암기하려 하면 그때부터 머리가 조금씩 멍해지는 현상을 매일 겪었는데, 거기까지가 바로 내가 하루에 암기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것도 양이 일정하게 말이다. 그러면 자체적으로 진도를 멈추고, 용량에 들어온 범위를 복습했다.
그땐 그게 재밌었다. 지금 보니 그게 웃긴가 싶지만 본인이 좋으면 됐지 뭐. 어쨌든 그런 컴퓨터 같은 일상 속에서 중간평가 동안 좋은 성적을 거두자 2스타상이 눈앞에서 더욱 감질나게 아른거려 이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맞이한 최종평가. 평가는 이틀 동안 진행됐고, 1일 차와 2일 차의 시험범위가 각각 정해져 있었다. 나는 교본에 있는 문장을 거의 다 외웠기에 범위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으나, 혹시 모르니 강약을 조절하긴 해야 했다.
따라서 전략적으로 거꾸로 뒤집어, 나는 1일 차 시험 전날 낮에는 일부러 2일 차 시험범위를 공부했다. 그런 뒤 밤이 되어서야 내일 범위를 집중해서 봤다. 그 이유는 1일 차에 집중하다 2일 차 범위를 잊어버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것도 그다음 날에 바로 시험 볼 거니까. 그동안 그렇게 미련하게 외웠는데 아깝기도 하고.
그땐 몰랐지만, 거기가 분수령이었다.
평가 당일이 되어보니, 평가관과 교관 사이에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던 것. 범위가 2일에 걸쳐 나뉜 것이 아니라, 1일 차에 필기평가 전 범위를 보고, 2일 차에 실기평가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어디서 전달이 꼬인 건지는 몰랐고, 우리가 사전에 공지받은 것과 달랐다. 따라서 우선 1일 차에 몰빵하고 2일 차는 다음에 벼락치기로 대비하려 했던 사람들은 큰 낭패를 봤다.
살짝 웅성웅성했으나 어쨌든 우리가 배운 범위에서 출제되었기에 교관님도 평가관에게 전면 재시험을 요구하거나 그러기가 애매했고, 수료 일정을 고려하면 시간도 촉박해 우리는 그냥 그대로 쳐야 했다.
일부 불만과 달리, 나는 시험지를 보자마자 두근거렸다. 안 그래도 교본을 거의 통째로 암기했기에 자신 있었는데, 더구나 내일 나올 범위까지 오늘 다 나온 것을 보고 이렇게 준비한 사람이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결과에 대한 강한 확신에, 답안을 써내려 가는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모르는 문제가 없는데도 그렇게 긴장이 되더라. 머릿속엔 온통 상 받는 생각뿐이었으니. 채점하는 분이 점수 매기는 걸 넘어 깜짝 놀라길 바라며, 외운 것들을 후회 없이 콸콸 쏟아붓고 싱글벙글 나왔다.
그리고 2일 차의 실무평가. 내 차례가 되어 평가를 보러 갔는데 평가관님께서 몇 가지 질문을 하시다가 갑자기 '자만하지 말고, 배워야 할 게 많으니 겸손하게 하나씩 헤쳐나가라' 하고 덕담으로 빠지셨다.
평가자-피평가자의 관계였음에도 그 말미에는 선배로서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셔서 감사했다. 지금도 명심하고 있다. 지금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걸로 미루어 보아, 금방 최종결과를 유추할 수 있었다. 입가가 살살 벌어졌고, 더 이상 등수가 궁금하지 않았다.
대구에 벚꽃이 쏟아지듯 내리던 날, 수료식을 마치고 28명의 동기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제 곧 흩어져 모두 교대근무를 시작하기에, 다시는 한날한시에 모일 수 없는 멤버들과 다시는 찍을 수 없는 사진 한 장을 찰칵.
화이팅을 외치며 들어 올린 주먹, 그리고 반대쪽 옆구리에는 반짝이는 무언가. 흩날리던 꽃송이들 아래 이제 교육도, 시험도, 성적도, 이제 모두 다 엔딩. 벚꽃 엔딩이었다.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
쟁취하고 싶다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