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14)
--- 이규보 (1)
어두운 방 스님처럼 앉아서
< 隱居茫然 (은거망연) >
--- “멍하니 숨어 사노라니”
小隱何人到 (소은하인도)
잠시 은둔해 있으니 누가 찾아 오리오
端居十日踰 (단거십일유)
고요히 지낸 지 열흘이 넘었다오
曉霞紅綺散 (효하홍기산)
새벽 놀은 붉은 비단을 뿌린 듯하고
夜雪白氈鋪 (야설백전포)
밤 눈은 흰 갓을 펼친 듯한데
冷火空頻撥 (냉화공빈발)
화로에 불씨도 자주 꺼지니
寒醅孰與㪺 (한배숙여구)
찬 술은 누구와 더불어 떠 마실까
虛堂無客位 (허당무객위)
빈집 손님 자리 텅 비어 있으니
幽室學僧趺 (유실학승질)
어두운 방 안에서 스님처럼 앉아 있네
쓸쓸한 겨울밤. 천마산 모옥(茅屋)에 찬바람이 분다.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자리에 나가지 못한 채 산속에 숨어 산 지 그 몇 해이던가? 무신들의 칼 끝에 왕실과 조정이 농락당한 지 수십 년, 도덕과 인의(仁義)는 사라지고 폭력과 이권만 번뜩이는 세상이다. 주경야독하며 선비의 절개를 지키려 애쓰고 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고, 곳간은 텅 빈 지 오래다. 누가 내 충정과 고독을 알아주리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번민한 지 십여 년, 이젠 찾아오는 이도 없다. 새벽 놀이 붉은 비단을 뿌려 놓은 듯 아름답고, 밤새 내린 눈이 여인의 갓을 펼친 듯 상큼하지만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영원한 친구는 술밖에 없다. 큰 국자로 거나하게 퍼마실 만큼 거르지 않은 술이 큰 독에 가득 하나 더불어 마실 이가 없구나. 텅 빈 마당 내려다보며, 서안(書案) 앞에서 발목 죄어 당겨 앉아 본다. 부질없이 스님처럼 가부좌 트는 연습만 하고 있다. 삭풍이 시리다. 봄은 언제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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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로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던 옛 성현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흘러 흘러 옛 모습은 변하고
자꾸자꾸 세월만 흘러가는구려
글씨: 허봉(虛峰) 길재성(吉在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