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19)
책을 어루만지며
높은 산을 우러러 보노라
< 褫官後作 (치관후작) >
-- “벼슬을 빼앗긴 후 짓다”
分將疏懶掩柴關 (분장소라엄시관)
새삼 게을러져 사립문 닫고 있으니
十日無人一往還 (십일무인일왕환)
열흘에 한 사람도 오가는 이 없구나
懷古誰憐空好古 (회고수련공호고)
돌이켜 생각하니 부질없이 옛 것을 좋아함을 누가 불쌍히 여기리오
愛閑自覺不如閑 (애한자각불여한)
한가함을 사랑하니 한가함만한 것 없음을 깨닫겠네.
風來樹影低簷暗 (풍래수영저첨암)
바람 부니 나무 그림자 처마에 닿아 어둑하고
雨送苔痕上砌斑 (우송태흔상체반)
비 온 뒤 이끼 흔적 섬돌 위까지 얼룩졌네
尙友前修眞枉尺 (상우전수진왕척)
진실로 굽히는 수양을 한 옛 선현을 숭상하면서
有時捬卷仰高山 (유시부권앙고산)
때때로 책을 어루만지며 높은 산을 우러러 보노라.
벼슬자리에서 물러났다. 아니 조정 권력을 쥐고 있는 권문세족 일당들에게 내밀렸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적한 시골집으로 이사했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 일찍 일어날 필요도, 서둘러 나설 필요도 없다. 사립문 걸어 닫고 있노라니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 권력이란 본시 무상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기 잇속만 찾는 세속에서 옛 성인군자들을 본받자는 훈계만 늘어놓았으니 듣는 소인배들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러니 이제 궁벽한 산촌에 거한다고 누가 나를 동정하랴. 그래 한적한 생활을 즐겨보자. 이 또한 내가 꿈꾸어왔던 생활이 아니었더냐. 바람이 불어오니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따라 그림자도 들락날락하고, 비 온 뒤엔 이끼도 섬돌 위에까지 기어 올라와서 은둔자를 찾아오는구나. 왕척직심(枉尺直尋)이라.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편다”지만, 지금 내겐 펴는 것이 아니라 굽히는 것이 필요하다. 이 누옥에서 진심으로 굽히는 수양을 했던 옛 선현들을 숭모해야겠다. 경서(經書)를 어루만지며 저 멀리 높은 산봉우리를 우러러 본다. 새삼 선현들의 경지가 높은 산처럼 우뚝하다......
**********
도서 출간 협의를 위해 본 시화(詩話)의 컨텐츠를
별도 보관한 베타 버전(Beta Version)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은
저자의 이메일(solonga21@gmail.com)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 비뚤어진 시대를 조롱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스스로를 자조(自嘲)하며 산 시대의 반항아였다.
눈 덮힌 사방 산엔 찾아오는 이 없고
파도 소리 속에 앉아 등불 심지 돋운다.
글씨: 허봉(虛峰) 길재성(吉在成)표지 사진: 유계(柳溪) 옥한석(玉漢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