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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산우옹 May 17. 2023

푸른 솔가지에  두건 벗어 걸었소

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22)

동방의 향기:

한시(韓詩)로 읽는 역사와 인물 (22)


푸른 솔가지에 두건 벗어 걸었소

< 半酣讀夜 (반감독야) >  

   -- “반쯤 취해서 책 읽는 밤


 筆落珠璣字字香 (필락주기자자향)

  붓에서 떨어진 구슬 글자마다 향기로운데

 遏雲歌裏引盃長 (알운가리인배장)

  맑은 노랫소리 들리니 술잔 길게 들이켜네

 半酣更覺君恩重 (반감경각군은중)

  반쯤 취하니 임금의 은혜 중함을 다시 깨닫고

 坐到深更冷欲霜 (좌도심경냉욕상)

  밤늦도록 앉아 있으니 서리 내릴 듯 차가워지네


  늦은 밤 서안(書案) 앞에 앉아 경서(經書)를 필사해 본다. 매화문양 벼루 위에 청자 연적(硯滴) 석간수를 조용히 따르고, 단산오옥(丹山烏玉) 먹을 들어 남포오석(藍浦烏石) 벼루 위에 조용히 갈아본다. 은은한 묵향이 방안 가득 퍼진다. 벼루 위 먹물을 휘감아 선련호필(善璉湖筆) 붓을 들어 올리니 붓촉에서 떨어지는 먹물방울이 구슬같이 영롱하고, 펼쳐진 화선지 위에 써 내린 글자들이 검은 비단처럼 반짝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맑은 노랫소리에 한 잔 가득 향기로운 술을 따라 천천히 들이켜 본다. 술기운이 온몸에 퍼진다. 돌이켜보니 수만리 머나먼 길을 돌아 겨우 고국에 돌아온 인생이다. 사고무친(四顧無親) 천애고아(天涯孤兒)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내가 오늘날 이처럼 영예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음이 어찌 주상 전하의 가없는 은덕이 아닐쏘냐? 더욱 충심을 다해 종사하리라 다짐해 본다. 어느덧 삼경도 지난 심야. 찬 서리라도 내리려는지 서늘한 바깥 기온이 방으로 밀려온다.


  가을밤 책을 읽는 선비의 단아한 모습이 떠오르게 하는 맑은 한시다. .....




**********


도서 출간 협의를 위해 본 시화(詩話)의 컨텐츠를 

별도 보관한 베타 버전(Beta Version)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의사항이 있으신 분은 

저자의 이메일(solonga21@gmail.com)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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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출중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되어, 그와 더불어 몰락한 고려 말 한 명문가문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도성에 들어오니 날은 벌써 어둑하니
슬픔에 잠겨
애오라지 시 한 수 지어보오     




글씨: 허봉(虛峰) 길재성(吉在成)

표지 그림: 공민왕 작 염제신 초상(보물 제1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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