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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름 Jul 18. 2024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사랑할 테다

아름세계 2024년 창간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최근에 외로움이 자꾸 말을 건다. 장필순의 건조한 바람같은 목소리가 예전 추억들을 부른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이 고픈 상태이다. 정호승 시인은 그 유명한 “수선화에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참 공감이 간다. 어쩌면 인간은 나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는데 더 적합한 동물이 아닐까? 나를 먼저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는 많은 전문가의 이야기가 틀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진화적으로 인간의 삶에 외로움보다, 자립심이 있는 것이 유리했을까? 글쎄, 모르겠다. 난 진화생물학자도 아니고, 심리학자라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의 상담 실무자일 뿐이다. 그냥 외롭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전엔 쳐다도 보지 않던 연애 프로그램들이 눈에 들어온다. ‘솔로 지옥’을 1편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한다. 예쁘고 잘생긴 출연자들이 사랑에 필요한 모든 감정을 쏟아내며 처절하게 경쟁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 보면, 순간순간 펼쳐지는 상황들에 과몰입하지 않을 수 없다. 크으, 덱스 멋있다. 괜히 테스토스테론이 끓어오른다. 뭐라도 해야 하겠다. 그래, 일단 사람을 만나자. 잔뜩 상기된 연애 세포들이 제안한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모임 같은 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하며 동행을 구할 수 있는 카페를 찾는다. 지난 두 번의 유럽 여행을 통해 동행을 구하려면, 인터넷 카페를 찾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찾았다. 와, 카페 공식 계정으로 크리스마스 기간에 여행 갈 사람을 모집하고 있다. 세부 내용을 보니 돈만 내고 예약하면, 버스를 타고 알아서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수 있는 전국 곳곳을 여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빨리 돈을 입금한다. 다시 솔로 지옥을 튼다. 오케이, 얼굴과 몸만 빼고 준비됐어. 딱 기다려라. 크리스마스.


 그렇게 12월 20일이 왔다. 출발 3일 전, 말 그대로 솔로 지옥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여행이 취소되었단다. 하, 크리스마스에 뭐 하지. 연애 세포들의 세포막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공연히 역정을 내며 환불을 빠르게 받고, 다른 사람들은 뭐 하나 하고 카페에 들어가 보니, 크리스마스 기간에 갑자기 개인적으로 여행 동행을 구하는 글들이 올라와 있다. 이 사람들이 나의 동지들인 것 같아, 자세히 보니 30대 남자들이다. 어휴, 갔으면 입영열차 안에서 눈물 떨굴 뻔했다. 갑자기 열정이 확 식는다.


 그러나, 이대로 교도소 기상 음악과 함께 크리스마스의 아침을 맞이할 수는 없다. 고민하다 지난 제주도 여행의 아쉬움을 불러온다.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가득한 피규어뮤지엄을 부모님의 강력한 저항으로 가지 못했던 기억이 나를 침대에서 일으킨다. 그래, 일본으로 가자. 일본에 디즈니랜드도 있고, 지브리파크도 있다. 완벽한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남은 시간 약 30시간,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숙소도 알아본다. 료칸 가고 싶은데… 가지 말까. 교통비 및 생활비도 계산한다. 하하, 총 150만 원 정도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가용한 돈은 100만 원도 안 된다. 일이나 하자. 지금은 잠이나 자자.


 아니다. 마지막으로 내 낡은 서랍 속에서 하나의 희망이 떠오른다. 나는 무한도전의 찐팬이다. 아무 클립 영상을 틀더라도, 어떤 특집인지 맞힐 수 있다. 종종 다음 이어질 대사를 맞추기도 한다. 무한도전 ‘히든카드’ 특집이 떠오른 것이다. 찐팬이라면 특집 제목만 들어도 기억날 것이다. 유재석이 어린이날을 맞아 착한 일을 한 육성우 어린이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해 방문한 바로 그곳이다. 그래, 서울에도 피규어 뮤지엄이 있다. 흥분한 손가락으로 찾다 보니 지브리 관련 기념품을 파는 곳도 알아냈다. 역시, 사람은 서울로 보내야 해. 빠르게 버스표를 끊고 동선을 짠다. 메모장에 계획을 입력하는 내 손이 날아다니기 시작하더니, 피규어 뮤지엄, 각종 팝업 스토어, 친구와의 약속까지, 크리스마스를 알차게 채운다. 참, 인생이 살기 어렵다는데 놀기 위한 계획이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열심히 놀고 와서 코로나에 걸려 오한에 떨며 올해를 되돌아보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내 감정에 솔직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솔직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어느 때보다도 진심이었던 크리스마스를 통해, ‘외로움’이라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을 해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외롭게 혼자 태어난다. 쌍둥이조차도 세상 밖으로 동시에 나오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자립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그래서 울고, 사랑을 갈구한다. 이때 사랑을 충분히 받아야만, 3~4세가 되었을 때 양육자와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다. 쉽게 말해, 어머니가 떠나 가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애착 형성 이후에도 우리는 적절한 친구 관계, 이성 관계 등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받으려 애쓴다. 결국, 외로움은 인간의 운명이자 본능이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구를 이제야 진정으로 체감한다. 그래서 외로움은 지난 사랑을 그리워하게 하고, 오지 않은 사랑에 애타게 한다. 필연적으로 아프고 괴롭다. 게다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함께 한다.


 그래도, 덕분에 사랑이 하고 싶어진다. 외로움이 없었다면, 사랑을 굳이 하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랑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쓰인다. 우리 세대가 사랑을 포기하고 혼자 사는 비율이 높아진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만나는 사람들을, 내가 하는 일들을, 지나가는 일상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려면, 많은 체력과 감정이 소모되고, 다른 것들을 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소비된다. 그래서 우린 무거운 가치는 덜고, 진지한 의미는 깎으며,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다. 그리고 눈앞의 편안함으로 위로하며, 절대 가벼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나 또한 방황하던 20대 초반처럼 무력하게 크리스마스에 외로움을 맞았다면, 어떤 도전도 하지 않고, 집에서 영화를 보며 조금 울고, 게임을 하며 모니터에 성내다, 과식하며 텅 빈 마음을 위로했을 것이다. 그래서, 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현재가 불안할 때, 인간이 얼마나 약해지는지를.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 덜어내다,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 버렸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한없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무서운 일이다. 운이 좋게도 이번엔 여유가 있고 에너지가 남아서, 외로움을 정통으로 맞을 수 있었다. 덕분에 미친 듯이 사랑이 하고 싶었고, 솔로 지옥을 보며 사랑을 상상했고, 결국 솔로로 남았지만, 좋아하는 것들과 친구들을 만나 사랑했다. 앞으로도 외로움이 온다면 만끽할 테다.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솔직히 받아들이고 표현할 테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사랑할 테다. 사랑이야말로 유일한 해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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