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기억에 의존하기에, 픽션이기도 하고 논픽션이기도 하며, 출판 후에도 언제든 내용이 변경되거나 추가될 수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모든 질서를 무너뜨리는 혼돈의 세상에서 진짜를 가짜에 담아내고, 가짜를 진짜처럼 편집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처럼요.
모든 것의 시작이신 부모님께, 우연히 만나 저의 삶을 구성하신 모든 분들께, 이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를 주신 룰루 밀러님께, 이 책을 바칩니다.
1.Prologue
아침에 눈을 떴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게 가위에 눌리는 기분인 건가. 드디어 나도 귀신과 조우하여 스릴 있는 썰을 하나 품게 되는 것인가. 순간 오싹하여 눈을 다시 감았다. 막상 실제로 귀신을 보면 무서울 것 같았다. 눈을 감으니 이미 눈 앞에 귀신이 와있는 것만 같았다. 동그란 눈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뜨길 기다릴 수도 있고, 귀까지 찢어진 빨간 입으로 나를 집어 삼킬 수도 있고, 기다란 손톱으로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수도 있다. 예측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나는 감히 눈을 뜨고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미로운 선율의 알람 소리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의 따사로움이 지나치게 낭만적인 탓에, 현실세계에 끌려와버렸다. 눈을 뜨고 몸을 살짝살짝 돌려보았다.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목이 돌아가질 않고 허리가 찌릿찌릿하다. 어머니께 소리를 질러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으나, 소리를 크게 내는 순간 허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안된다. 남자는 허리가 생명이랬다. 간신히 스마트폰을 찾아서 통화버튼을 누르고 속삭였다.
“엄마, 나 몸이 안 움직여요.”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자세의 문제였을 것이다. 왜 신체 균형이 무너질 정도로 경직되었던 걸까? 하루 종일 불안하고 답답한데 털어놓지 못하고,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이를 감추려 애써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실패와 자책, 성찰과 깨달음을 끔찍하게 반복하게 된 것은 꿈을 꾸게 된 순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들은 물어볼 때마다 꿈이 바뀐다. 대부분의 훌륭한 어른들은 놀란 척하며 이유를 물어보고, 기특해하며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그러고 나선 하고 싶다는 게 있으면 시켜주려고 노력한다. 하게 되면 꾸준히 했으면 하지만, 몇 번 설득하다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양보한다.
나의 부모님도 훌륭하셨으며, 다른 점이 있다면 항상 진지하셨다는 것이다.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하면, 파주 영어마을과 미국 캠프를 보내주셨다.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합창부와 밴드부를 시켜주고 피아노, 우쿨렐레, 드럼 등의 악기를 배우도록 지원해 주셨다. 경찰청장이 되고 싶다고 하면, 경찰서 홈페이지에 있는 서장과의 대화에 편지를 남겨 서장님을 감화시킨 후 직접 대면할 수 있게 해주셨다.
다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진취적인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자란 아이는 누구보다도 자기 주도적인 학생으로 성장했다. 인간의 심리에 관심이 많아진 후로 필요할 때마다 심리상담사, 프로파일러, 행동심리전문가, 정신과 의사 등등을 만났고 몇분과는 지금까지도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현재는 교정직 공무원으로서 심리치료팀에서 수용자들을 상담하며 꿈을 실현하고 있다.
꿈은 나를 숨 쉬게 하고 움직이게 했다. 꿈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고, 위기를 언제든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믿게 해준 신이었다.
그러나 마치 어린시절의 다짐처럼 철없이, 나의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신을 따라가는 길에서 얻은 성취들은 한번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신은 어리석은 나를 용서하시고 넘어질 때마다 항상 응답을 주셨다. 반복적인 자책으로 인한 무력감으로 우울증이 의심될 정도인 지금, 그 모든 응답들을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들을 한땀한땀 하나의 실로 꿰매다보면, 살아갈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간절한 기도였다. 눈을 감았다. 굳이 손을 모으진 않았다. 가식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길 바랐다. 이로써 어떠한 위기에도 꿋꿋이 다시 일어나 걸어갔던 나의 성지를 순례할 모든 채비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