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표현 사이
두 편을 몰아서 봤다. 제목이 말하듯 동류의 작품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둘을 엮어 뭘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결론을 말하면 완전 실패다. 너무 많이 졸았다. 남겨서 쓸만한 '꺼리'가 별로 없는 것은 필자의 무지로 인해 현실 공감이 만들어내는 생각지도를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순전히 필자의 능력 부재한 현실만을 직시하고 있다.
'한 채'는 그놈의 집 한 채를 가지기 위한 문호와 도경의 결탁에 초점을 맞춘다. 그 중간에 문호의 딸 고은이 등장한다. 고은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이 부녀는 모텔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문호의 형이 문호를 타박하는 것으로 보아 문호에게는 과거에 지탄받을 만한 행적이 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게 다다.
도경은 얹혀살고 잇는 누나집의 전세를 올려달라는 갑작스러운 집주인의 요구에 집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증액된 전세비용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그래서 문호와 도경의 합치점에 위장결혼이 등장한다. 고은과 도경을 부부로 만들어 동거를 시키고, 진짜 부부행세를 하게 만들어 주택을 분양받겠다는 계획이다.
아파트 당첨이 되자, 중도금을 비롯한 입주 자금이 없다는 사실을 근거로 명의변경의 방식으로 소위 말해 피를 먹고 소유를 포기하고자 하는 도경, 그러나 어떡하든 내 집을 가지고 싶은 문호 사이에 갈등이 파급되고, 브로커를 폭행하는 사건으로 이어진다.(폭행이 일어났는지도 정확히 알 수없다.) 그로 인해 문호는 수감자 신세가 된다.
이질적인 환경 속의 두 사람이 만나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가정의 탄생에 대한 불가능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한 채'는 상징적이다. 도경에게는 장애인과 결혼을 하는 일이거나, 대책 없는 장인을 만나는 일이며, 고은이나 문호에게는 집(가정)의 소중함을 돈으로 팔아버리려는 남자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된다.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과 관계없이 이 영화가 감흥이 없는 것은 캐릭터가 가지는 과거사의 디테일이 드러나지 않고 있고, 그로 인해 물리적인 주택, 집의 가치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뜨거운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예열을 한다거나, 뜨거움 자체가 가지는 뜨거움의 강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둘 중 어느 하나도 설득력과 절실함이 없다. 설득하기 위해 입을 닫고, 절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개인사를 죽였다. 그래서 영화는 대단히 느슨하게 다가와서 쓸쓸하게 멀어져 간다. 그렇게 가족은 탄생한다는 쓸쓸한 상징, 엔딩이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의 눈에 익은 결혼식장의 흔한 장면은 레드카펫 위에서 아버지가 몇발짝 걸어 마중나온 사위에게 딸을 넘기는 장면이다. 사실, 문호의 목적은 집이 아니라, 딸을 도경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오직 하나, 문호와 고은이 캐리어를 끌고 달동네 골목을 화면의 양쪽에서 거슬러 올라가는 첫 장면, 그건 마치 비행기가 서서히 지상으로부터 이륙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화면이 시작되고 컷으로 장면이 날아갈 때까지 캐리어의 바퀴소리는 이륙하는 비행기의 엔진이 내는 굉음처럼 들린다. 그러나 현실은 힘겹게 캐리어를 끄는 그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들은 이 무거운 중력이 지배하는 지상을 떠나 어디로 날아오르려는 것인가, 슬프게도 이들은 지상에 '방 한 칸'(한 채) 없는 존재를 넘어 남들 같은 '가정'을 꾸릴 수 없는 천형과도 같은 굴레를 짊어진 아버지의 업과 같은 무게가 이 영화의 중심에 있다.
세입자의 현실은 더 비극적이다. 리모델링을 위해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어린아이가 주인이다.)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 없는 세입자 신동, 그가 친구의 말에 따라 월월세를 놓게 된다. 그러면 법으로 세입자를 내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비현실적 법이다. 여기서 이 영화가 사실주의극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월월세남과 그의 아내가 나타난다. 이들의 등장이 압권이다. 이들이 흑백의 화면 속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을 연상시킨다. 그로테스크한 현실, 그 기괴한 현실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캐릭터들이다.
신동이 월세 세입자에서 탈출한다. 회사의 관사를 제공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월월세입자를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화장실에 든 월월세입자가 다시 월월월 세입자 즉 천장세입자에게 천장을 세를 놓아버린 것이다. 이건 현실과 상상이 결합한 기괴한 상징이다. 무엇이 현실인지 무엇이 상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묘한 설득력으로 다가온다. 이게 이 영화의 묘미다.
그러나 이런 많은 장점을 보이지만, 이 영화의 중심에 선 주인공 신동이 너무나도 일상적 캐릭터에 머물고 있어 이 영화의 기묘함의 반쪽을 싹둑 잘라먹고 말았다. 결국 월세 세입자는 자가를 소유하지 못하며, 이 월세와 월월세의 순환고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준비했다면, 주인공부터 상징의 알레고리적 시혜를 수여했어야 했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진수성찬 앞에 앉아 수저가 없어 군침만 흘려야 하는 관객의 꼴이 난 것.
집을 중심에 두고, 한국인이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현실, 자본이 창출한 도시의 미개한 사회문화적 구조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를 신랄하게 비꼬고 있고, 애도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기본적으로 골조는 갖춰진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아직도 골조조차 없는 집, 이루어지지 않는 가정을 꿈꿔야 하고, 가정은 뒤로 한 채, 물리적 공간으로써의 집 문제로 정신이 탈탈 털려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