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히든카드
두 개의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서사가 진행된다.
하나는 성진과 수연의 애정라인, 이것은 현재 시점으로 진행 중이다. 빈약한 집안 출신 성진은 자수성가한 지휘자다. 그를 끌어준 사람이 결혼 상대자 수연. 성진은 수연의 일방통행에 못마땅하다. 오케스트라 선곡도 그렇고, 저택에 들어와 신혼살림을 꾸리는 것도 그렇다. 수연의 모친이 오케스트라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국하면서 성진과 수연의 관계는 삐걱댄다.
또 하나는 수연과 미주의 애정라인이다. 둘 사이의 공적인 관계는 대학 선후배, 미주가 고등학생일 때 지도교수에게 레슨을 받으러 다닐 때부터 둘은 동성 연인이라는 사적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그러니까, 수연이 성진을 데리고 옴으로 인해 졸지에 미주는 수연으로부터 배신당하고 마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두 커플의 관계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수연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양다리를 걸친 형국. 이런 식으로 수연은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미주라는 카드를 버리고 성진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미 수연과 미주는 지배(도미넌스, Dominance)와 복종(서브미션, Submission)의 깊은 관계에 빠져 있는 상태다.
수연이 가진 지배적 성향은 결국 모든 걸 소유하고야 마는 어릴 적 성격으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번 가지려고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가지고야 마는 성격, 지도교수의 저택도 자신의 손에 넣고 신혼 살림집으로 꾸며놓았고, 이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긴 하지만 성진에 대한 지배력도 행사 중이며, 그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사고를 고의적으로 발생시키면서 위기가 고조된다. 그리고 구속에서 풀어주었다고 생각한 미주에 대한 소유도 결국 실현시키고 만다.
성진과의 서사가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고, 미주와의 서사가 과거로부터 밀려 나오면서, 성진과 미주의 시공이 교차한다. 시공의 교차는 덜 위험한 상태의 사건을 더 위험한 쪽으로 전환시킨다. 이렇게 전환된 사건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방아쇠 기능을 하게 만드는 것이 수연의 모친 혜연의 문자다.
그러나 고조된 위기는 금방 식어버린다. 우습게도 미주가 실토해 버린 것, 그래서 이 스토리를 통해서는 마땅한 절정을 맛보지 못한다. 비밀 창고의 문이 순순히 열리는 것, 성진이 미주의 머리를 벽에 박게 하여 쓰러진 사이 수연을 구출해 버리는 싱거운 결말이다.
이제 반전을 기해야 할 때가 왔지만, 반전도 없다. 관객이 생각하는 반전은 이미 예상한 바다. 이미 예상한 바는 반전이 아니다. 서사의 중심이, 성진-수연에서 성진-미주로 옮겨 가면서 매직미러를 통해 주도권이 전환되는 것을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우습게도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으로 주도권을 잃어버린 수연은 서브로 전락해 버리는 고통을 맛보지만, 새로운 서브의 도움으로 도미넌스를 회복한다는 것. 이제 반전이 보이는가?
이렇게 반전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반전도 아니다. 히든, 숨겨진 얼굴은 누구? 미주의 히든은 성진을 지배하려는 얼굴이고, 성진의 히든은 수연에게 복종해야 하는 서브의 얼굴이다. 그러면, 수연의 히든은? 놀랍게도 수연에게는 히든이 없다. 수연은 시종 변함없는 고정 캐릭터다. 이것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극 중에서 하는 역할이다. 고정불변의 악인 셈.
엊그제 선포된 계엄사태를 보라. 잘못된 선택으로 주도권을 잃어버린 수연의 히든이 누구겠는가? 성진이 서브로 전락하는 것처럼 주도권 쟁탈에서 원래 자리, 서브로 돌아가고 있는 그들만의 히든페이스, 이것이 반전이 아니라면, 이 서사에 어떤 반전이 더 있어야 하겠는가!
-원작 영화, 안드레스 바이즈의 2011년작 '히든페이스'를 모티브로 한국적 감성으로 직조했다고 한다.
-성행위 묘사가 농도가 짙어, 노출(아그렉소필리아, Agrexophilia)과 관전(스코포필리아, Scopophilia)에서 오는 도착적 성행위를 묘사한다. 그래서 관객이 많은 것인가? 손익분기점이 140만이라는데, 이제 겨우 80만을 넘겼다고 하니 더 많이 봐줘야 한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이유 없이 등장한다. 슬퍼서? '내 슬픔보다 더 슬프다'는 슈베르트와 영화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송승헌의 목소리연기, 조여정의 얼굴 연기가 창출한 변신이 성공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