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불안과 우울
재미있는 영화다. 재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의 존재 의식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재미있다는, 정공법으로 취급하면 늘어지는 스토리에 가중되는 무게감만큼 지리해지는 소재를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뜻이다.
우선 그 첫째가 밝은 색감이다. 소재나 내용이 주는 어두운 일상의 모습은 자칫 무거운 톤의 색채를 요구할 수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건 마치 도시가 주는 슬픈 연가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 아무리 슬퍼도 웃는 얼굴을 할 수 밖에 없는 조커의 얼굴 같은 도시를 형상화하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다. 인물들이 나누는 슬픈 이야기들 배경에 알록달록하게 피어오르는 도시의 불빛들, 설레는 감정으로 연애에 돌입하는 남녀의 뒷배경을 뒷받침하고 있는 불빛 역시 그렇다. 인물들의 우울 뒤에 즐거움이 가득 차있고, 기쁨의 배경에도 역시 그 반대의 감정을 담고 있는 도시의 불빛, 슬퍼도 슬프지 않고, 즐거워도 즐거울 수 없는 도시에 미망은 기대고 있다.
그래서 두 번째가 익명성이다. 이들에게 이름을 줄 수 없는 이유는 이름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구분이 없다는 것, 너와 나를 치환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세계, 만남과 헤어짐에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이며, 이렇게 삶이 서걱거리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거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고 그걸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불만으로 이 모든 상황이 이물감이라는 불쾌로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익명성은 이들의 존재 근거로 도시를 부유한다.
세 번째는 카메라와 인물간의 거리다. 카메라의 눈은 삶을 살아가는 군상들을 멀리서 비춘다. 그래서 거리의 군중과 등장인물과 구분을 두지 않고 있다. 등장인물이 군중들과 차별점에 서는 때는 골목 안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거리와 골목은 사실과 허구를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고, 시간의 교차가 일어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들은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과거의 애인은 담배대화에 실패하고, 새로운 애인은 담배대화에 성공하는 것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구분한다.
다시 골목의 골목으로, 시간은 거슬러 과거로 돌아간다. 실제로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없으니 현재 존재하는 과거의 공간으로 갈 수밖에 없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만난다. 그리고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들은 헤어진다. 그리고 버스는 달려가고, 어디선가, 내려야 하는 시점이 온다. 버스는 텅 비고, 버스밖 도시는 여전히 도시의 불빛으로 알록달록하게 건재하다.
카메라의 눈은 텅 빈 버스에 고정되어 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향해가는지 알 수 없는, 그저 각자가 내려야 할 목적지만이 분명한 태로 버스는 달려가고 있다. 이 얼마나 시적인가, 한강의 재식주의자가 시적이라고들 말하는데, 미망은 그에 버금간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그를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으로 받았다. 흔들리며 가야 하는 존재, 그리고 어디선가 내려야 하는 존재, 저마다의 불안과 우울을 안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 하나하나가 시가 되고, 이야기가 되는 곳이 이 세상이라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네 번째는 대사다. 언어의 문제는 한정적인 단어의 개수로 모든 표현을 다 해야 한다는 데 있다. 소쉬르의 구조주의언어학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각자리에 올 단어들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시간만큼 빠르게 선택된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선택한 말은 '덕분에'와 늘 변함없이 '다 그런 거지'라는 관용구들이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으며, 그래서 그렇게 큰 희망의 방점도 거기에 더 이상 없다는 뜻이다. 언어는 힘을 잃은 지 오래고, 더 이상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래서 모든 대화는 반복이다. 반복되는 상황도 그래서 이상할 것이 없다. 언어가 혁명이었던 시절이 더 이상 아닌 시대를 사람들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모든 과정을 거친, 남자와 여자, 그들과 관계 맺은 또 다른 남자와 여자들, 결국 세상은 이런 사람들의 연관체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그걸 사회라고 부른다.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다가 어디로 가야 할 존재인가, 영화는 물음을 던진다.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 단언컨대 그런 영화가 재미있는 영화다.
-미망이라는 글자를 한자로 다르게 써가며 중간제목으로 제시한다. 迷妄 하나로 족하다.
-패스트 라이브즈와 결을 같이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