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것들
감독에 대한 이야기인가, 배우에 대한 이야기인가, 시선과 생각은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등장인물들이 눈을 감을 때, 객석의 어둠 속에서 눈을 더 크게 뜨게 만드는 영화…
첫 장면에 나오는 1947년이라는 자막이 관객을 속인다. 알고 보니 그건 영화 속 장면이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미겔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2102년의 현실로 돌아와 있다.
미겔이 출연하게 된 TV프로그램은 22년 전에 실종된 배우 훌리오에 대한 탐사보도다. 그의 실종은, 자살, 살해, 스캔들 등 다양한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다. 분명한 것은 그가 영화 촬영 도중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작품이 미완으로 남아 있다.
영화로 시작하는 첫 시퀀스가 현실처럼 보이는 것은, 극 중 드라마와 같은 선상에 놓인듯한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현실적 정황의 제시를 더해 관객은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 것. 영화 장면에 이어 현실로 돌아온 TV 프로그램 속의 대담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노리고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진짜 스토리에 편입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연출상의 기술은 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감독의 특별한 시각을 말해준다. 현실과 가상, 현실과 추측을 뒤섞어 결국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도록 스토리를 마구 흔들어버렸다.
훌리오의 기억을 되살려내고 싶은 미겔이 선택한 것은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다. 이 극장에 초대되는 인물은 훌리오의 지금 현재의 삶을 끌어가고 있는 수녀 2명과 양로원 관리자 베렌, 훌리오의 딸, 훌리오와 미겔의 연인이었던 롤라, 그리고 편집자(영사기사) 마크와 미겔 자신이다. 이들은 훌리오의 과거와 현재다.
미겔이 선택한 영화라는 도구는,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간을 각인(봉인)하는’ 데 충실한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시점에서 기억을 상실한 훌리오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봉인된 시간을 다시 풀어주는 방법이 어쩌면 최선일 수 있겠다는 미겔의 판단에 의해서 이다. 그래서 봉인된 시간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는 발상은 영화감독 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눈을 감아야 보이는 영화
딸 아나가 아버지 훌리오를 만난 자리에서 감는 눈, 미겔에 의해 상영된 영화의 장면을 보며 눈을 감는 훌리오의 모습은 눈을 감아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이 진짜 영화다. 그건 미겔이 쓰고 있는 소설의 첫 문장과도 같은 것이다. ‘예술가 OOO이 쓰는 글보다 더 예술적인 것은 그의 삶 자체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그 문장은 이 영화에서 줄곧 내레이터,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수행하는 미겔의 삶뿐 아니라, 그의 친구 훌리오, 이들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 전체가 과히 예술적보다 더 아름다운 삶 자체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영화는 끝내 훌리오가 왜 스스로를 실종시켰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삶의 본질을 알고 싶어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 같다. 영화 속의 아버지가 이유를 묻지 않아서 가장 좋아한다는 체스말 '슬픈' 킹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감독은 영화에 자신의 인생을 헌사한다. 인생이 아름답다면 영화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정착하게 되면 소식을 전하겠다고 한, 그의 아들은 죽고 없지만, 아버지이자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인 미겔의 정착지는 지금 여기 극장이다. 그들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봉인된 순간순간의 기록들이 필름 속에 고스란히 들어앉아 빛을 감추고 있는 그것, 그래서 영화가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사라지는 것이고, 시간이 사라지면 그들은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영화,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 어두운 곳에서 더 환하게 빛을 내는, 그것들은 항상 당신 속에 있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