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기에 대한 용기
흔히들, 어떤 커밍아웃이든 시간이 지나면 용기로 평가받는다. 단지 지금의 현실에 주저되고 두려운 감정이 지배할 뿐 결국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부드러워지고 편안해져야 한다, 고 우린 믿고 싶다.
이 영화가 다른 퀴어 영화와의 차별성을 가지는 지점은 사건이 섞여 있다는 데 있다. 고독사 문제, 공동주택에서의 사생활 문제와 집단 이기주의의 문제, 거기에 동성애 문제까지 마구 섞어 놓았다.
처음에, 선우는 화장실 하수구를 통해 올라오는 역한 냄새를 견뎌낼 수 없다. 몇 번에 걸쳐 관리실에 얘기해서 확인한 결과 자식들과 절연한 여자노인의 고독사, 그 처리과정이 법적으로 만만찮은데 고도한 개인정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개인의 권리가 집단의 불편함을 야기한다. 거기에 집값이 떨어진다는 집단 이기주의까지 한 몫하고 나선다.
주민들이 선우의 행동에 제재를 가하자 같이 살고 있는 희서가 가로막고 나선다. 우리 둘에게 외부인들이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 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어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희서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
하지만 선우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아래층 할머니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주하게 된 진실, 고독사한 할머니에게는 동성 커플이 있었던 것, 자신의 미래라도 되는 양 선우는 그들에게 애착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에 쓸 사진을 구해달라는 요청에 폐기처분할 가재도구를 뒤지다가 주민과 마찰이 생기고, 수세에 몰린 선우를 구해주는 건 여중생, 선우의 삶을 이해하겠다는 미래세대다. 이렇게 이 영화는 과거의 동성커플, 현재의 동성 커플. 그리고 장차 다가올 미래 사회의 구성원들이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미래는 절망적이지 않다.
땅을 파고 할머니의 사진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해바라기를 심는다. 그 무덤 앞에 선우와 희서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밀레의 만종이다. 부디, 그들에게 평화와 휴식의 종이 가슴 깊은 곳까지 울려 퍼지기를 기도한다.
아픔은 아픈 자들만이 안다.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아픔을 감당할 수 있으랴. 그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도, 한 그루 해바라기가 꼿꼿하게 대를 세우며 태양을 향해 아프게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며,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한 폭의 해바라기가 곱게 수놓아졌으면 한다.
럭키와 아파트 사이에 쉼표가 있다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라는, 이들에게 닥친 현실이 오히려 '럭키비키'한 현실임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13층에서의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마지막 장면은 사족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독사한 할머니 뿐 아니라 생활에 스며들기 위해 고군분투해나가는 이들의 삶에 누군가가 보내는 감사표시라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할 수있는 재미를 더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