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요리한다
요리하는 영화다. 그것도 미식가들의 나라라고 하는 프랑스의 각종 코스요리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준다. 광어가 통째로 나오고, 등갈비가 여러 차례 손질되어 오븐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다.
이렇게 영화는 신선한 채소가 자라는 밭을 한바퀴 돌고 큰 솥에 각종 야채들이 쏟아져 들어가며 데쳐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요리사 외제니의 부엌이다. 그녀가 만들어 서빙되는 요리들이 어린 하녀들에 의해 손에 들려 나온다. 도댕과 그의 친구들, 이들 다섯 명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도댕의 요리에 빠져있다. 도댕 역시 요리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요리사는 외제니다.
외제니와 도댕의 관계는 애매하다. 귀족으로 저택을 소유한 도댕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유한 계층이다. 외제니는 그의 집에 고용된 요리사다. 도댕이 요구하는 모든 요리를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완성해 내는 요리사. 그렇게 도댕과 외제니의 사회적 관계는 고용 피고용의 계약 혹은 주종관계로 짐작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서로 대등하며,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애매하다.
1800년대 전반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프랑스 혁명 이후 각종 사회적 갈등이 난무하던 시대 위에 서 있다. 계급의 갈등, 남녀의 갈등, 빈부의 갈등, 프랑스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도댕과 외제니의 관계를 바라보면 이들의 애매한 관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함께 20년을 보낸 세월이 이 둘 사이에 흐른다. 요즘 말로 하면 이 둘은 사실혼 관계에 있다.(지금은 헤어졌지만, 실제로 이 둘은 사실혼 관계로 둘 사이에 딸이 있다.) 신분의 차이를 뛰어 넘어 저택의 주인과 그 저택의 요리사인 여성이 어떻게 대등한 관계로 자리매김하며 성장하는가를 중심 매개인 요리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성을 쏟아부은 요리 속에 넣어 놓은 청혼 반지, 모두의 축복도 잠시, 곧바로 이어진 외제니의 죽음, 절망과 슬픔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도댕은 그대로 삶을 내려놓기 일보 직전의 상태가 된다. 중동의 왕자를 초대한 일이 떠올랐고, 그에게 대접하고자 한 프랑스 서민들의 음식을 대표하는 ‘포토푀(Pot-au-feu)’를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 요리를 완성해 줄 외제니는 가고 없다. 온갖 요리사를 다 불러 음식을 만들어보게 하고 스스로도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어보기도 하지만, 외제니의 ‘포토푀(Pot-au-feu)’를 재현해 낼 수는 없다.
되살려 낼 수 없는 요리처럼, 그들이 함께 한 세월 또한 재현해 낼 수 없는 것. 이처럼 도댕과 외제니 사이에 흐르는 세월에 녹아든 것이 음식이었다. 그들에게 요리는 무엇인가? 주방에서 도댕이 외제니의 머리였다면, 외제니는 도댕의 손과 발이었다. 도댕이 꿈꾸는 이상이 외제니의 손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외제니가 죽고난 후 도댕의 삶은 외제니의 재현을 위해 존재한다. 그녀를 다시 재현시켜 현재화하는 것이야말로 도댕이 꿈꾸는 현실이 된다. 도댕이라는 정신에 외제니라는 몸을 입혀 놓는 것이다.
정신과 몸이 둘이 아니며, 끊을 수 없는 하나라는 것을 음식을 통해 말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는 이룰 수 없는 ‘문화와 기억’이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은 도댕과 외제니가 함께 만들어내는 궁극의 음식일 수도 있고, 그 둘이 지난 세월 추구해 온 ‘사랑’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 음식이란, 둘 사이에 놓인 계급도 남녀의 성별도 초월하여 그들을 생존하게 한 물리적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외제니가 묻는다.
“나는 당신의 아내였나요? 아니면 요리사였나요?”
“요리사였소!”
외제니는 이 순간 왜 신뢰의 미소를 보여주는 것인가, 여성이 가지는 혹은 아내가 가지는 굴종의 주종관계를 벗어버리고 대등한 한 사람의 ‘요리사’로 응대한 도댕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19세기적 사회관을 바탕에 한 이 영화는 그래서, 시대극이자 사회극이라 할 수 있다.
영화가 끝나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이유는 도댕이 인용한 다음의 말 때문이다.
“행복이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
사랑도 행복도 ‘저만큼 혼자서’ 있다. 그래서 사랑은 늘 외롭고 쓸쓸하다. 프랑스 코스요리가 우리로부터 저만큼 멀리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