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학의 정범
Nobody looks back.
여기 한 개의 가족이 있다. 아내는 시를 사랑하는 시인처럼 보인다. 남편은 고등학교에서 프랑스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아들은 도시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이성관계가 잘 안 되는 고민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다.
아내(그레이스)의 일상은 행복해 보인다. 남편의 무정함에 대해, 집을 떠나 있는 아들의 무심함에 대해, 아내로서 엄마로서 감정 과잉 상태다. 그런 상태를 자유로운 영혼처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편(에드워드)이 생활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무뚝뚝한 사람이라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저녁식사 후 그레이스는 설거지를 하는 에드워드에게 우린 다른 부부에 비해 대화가 없는 것 같으니 뭐든 말해 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에드워드를 불편하게 만드는 대화를 종용한다.
햇살, 우리 둘 사이에 없기 때문에, 있었으면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에드워드의 대답이다. 에드워드는 이 대화의 끝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재촉한다.
-당신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있는 그대로 말해봐.
-말하면 틀렸다고 할 거잖아.
마치 엄마가 아들을 다루듯 그레이스는 대화를 주도한다.
-당신은 내게 없는 걸 원하는 것 같아.
자포자기하듯 에드워드는 말을 뱉어버렸고, 그레이스는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사랑은 말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라고 했잖아, 하지만 말을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앞머리가 다 빠져나가 훤해졌고 백발이 된 에드워드가 매일 아내에게서 듣는 이야기의 레퍼토리다. 그래서 그는 매사를 아내에게 맞춰 산지 오래된 것처럼 보인다.
-그 속에 있는 미음을 말로 해봐, 왜 못해?
-지금은 하기 싫어.
-왜?
-당신이 시켜서 하는 거니까.
-상관없어.
-왜 그래? 애들처럼.
-말해!
그레이스가 에드워드에게 부부생활을 통해 반복적으로 행해왔던 것은 일종의 폭력행위다. 감정폭력. 대화폭력. 가스라이팅에 의한 생활 폭력, 결국 이 대화의 끝은 충격적이게도, 그레이스가 에드워드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영국의 매 맞는 남편, 올해로 결혼 29주년이었다.
매일매일을 말로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아내, 그의 옆을 지키며 29년을 보낸 에드워드가 요즘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철수 사건이다. 부상자들을 싫은 마차를 모는 병사는 일부러 험한 길을 간다. 마차가 덜컹대는 사이 부상병들이 마차 아래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의도적 행동이었다.
에드워드 역시, 29년 동안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떨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의 삶 역시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falling in love
그녀의 이름은 안젤라다. 가르치는 학생의 엄마, 학부모다. 에드워드는 1년 전 그녀에게 자신을 이해받았다. 한 번에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에드워드는 그레이스 옆에 있을 수 없는 마음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이혼하려고 한다.
그래서 아들 제이미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자신이 집을 나가고 나면 엄마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라는, 일종의 배려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레이스는 여전히 사랑을 믿고 있다. 에드워드는 그레이스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는 에드워드에게 이제야 솔직히 마음속을 털어놓는다며 잘하고 있다고 재촉한다. 그레이스는 습관처럼, 에드워드를 가르치듯 말한다.
에드워드의 진심을 들은 그레이스는 납득도 안 됐고 이해도 안 되는 충격에 휩싸인다.
-앉아, 나도 노력해 볼게, 가더라도 아침은 먹고 가야지, 앉아.
평소 같으면 고분고분했을 에드워드는 나가버린다. 아마도 살면서 첫 번째로 아내의 말에 따르지 않은 행동처럼 보인다. 에드워드에게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나 보다. 에드워드가 그레이스를 처음 만났던 기차간에서, 자신의 슬픔을 알아봐 주고, 공감해 줬기 때문이었고, 그것을 그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29년 전에 그레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안젤라라는 여자가 나타나, 에드워드의 슬픔을 보듬어주게 되었고, 에드워드는 잃어버렸던 사랑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기쁨과 안도를 느꼈을 것이다. 사랑은 변하지만, 매번 같은 것에 빠진다는 것을 알 나이도 된 것 같은데...
Not is anymore.
그야말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을 겪은 그레이스는 안젤라의 집을 방문한다. 핑계는 남편의 물건을 돌려주기 위해서다. 안젤라의 유감없는 특기, 말꼬리 잡고 늘어지면서 남에게 상처주기 대화법을 시전 하려는 찰나, 안젤라가 말한다.
-세 명의 불행한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렇게까지, 세 사람의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해 낼 수 있을까?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의 힘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안젤라는 그레이스에게, 상간녀가 아니던가. 적어도 그런 볼썽사나운 육탄 돌격은 하지 않을 교양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역시 모든 재산을 그레이스에게 증여하고 나온다. 그게 이혼의 조건이었다. 새로 키우는 개의 이름을 에드워드라고 부르는 사소한 복수를 하는 그레이스의 귀여움성도 보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29년 동안 에드워드를 개를 키우듯 했다는 뜻도 통할 터이니, 섬찟한 일이 되기도 한다.
이 영화는, 가족 구성원인 세 명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각자의 자리를 명확히 하고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 유일하게 엄마이자 아내인 그레이스가 문제의 인물로 드러난다. 29년간 참았으면 전 인생을 걸쳐 참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이제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는 에드워드, 난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 자원봉사를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래서 죽음도 생각해 봤다는 그레이스, 지금 일어난 일은 부모의 문제이지 절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아들 제레미의 태도. 그렇다고 제레미가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절대 아니며 오히려 두 분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이 상황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계속 엄마의 상태를 걱정하는 에드워드, 조금씩 현실을 인정하고 안정을 되찾아가는 그레이스. 남의 인생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참견하고 간섭 감시하려는 그레이스의 태도 때문에, 남편과 아들은 괴롭고 힘들다.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이지, 처음부터 나쁜 인간은 없는 것이다, 라는 대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관점이다. 사람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선한 태도를 가진 영화다.
감독은 아들과 아버지를 같은 편으로 묶어 놓고 있다. 그리고 안젤라도 아마 여기에 묶여질 것 같다. 남는 한 사람,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강제로 하게 하면서, 매일 끊이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며 그런 방식만이 관계를 개선시키고, 사랑으로 충만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는, 일방적인 사랑의 믿음을 강요하는 시를 사랑하고 신 안에서 행복한 그녀, 그레이스. 그녀에게 자비를! 한국적 현실 속에서, 이 땅의 고통받는 여성들에게도, 그중 이중고를 겪는 엄마들에게도 자비가 있기를.
Hope Gap
그레이스가 늘 산책하는 바닷가 절벽의 이름이다.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곳, 자살바위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절망에서 희망의 아이콘으로 이름을 바꾼 지명이 이 영화의 제목이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 시작과 끝에 이 영화가 있다.
이별 후에도 에드워드는 그레이스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 한다. 그러나, 그와 그녀의 사정처럼, 둘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숨바꼭질 놀이에서 도망자와 추격자 사이에는 잡힐 듯 잡힐 듯 하지만 잡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고, 이 섬과 저 섬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바닷물로 가득 차 있다. 그레이스가 에드워드를 쫓을 때 벌어진 간격만큼, 이제는 에드워드가 그레이스를 쫓는 간격이 생겼다.
분명한 것, 사람들 사이에 그 간격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구의 개인주의적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이다. 이미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비록 많은 부작용과 불협화음의 현실 속에 살고 있지만 말이다.
절망이라는 현실의 절벽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한 사람의 끝에 저마다의 절벽이 있다는 사실, 그 사람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마주한 절벽에 마주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절벽과 절벽이 만나면 새로운 길이 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해본다.
and... The poetry
영화 속에 나오는 몇 편의 시들은, 이런 삶의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위로들이다. 아들 제레미가 만들어준 웹사이트, 앤솔로지 시집 속에서 희망을 검색하면 나오는, ‘섬광’이라는 시는 그레이스가 애송하는 시이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놀랍게도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그레이스이며, 나머지는 그녀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이다. 우리 모두(관객인 우리까지도)는 그레이스가 고통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으며, 그녀 또한 그녀가 사랑했던 시들과 함께 다시 한번 기쁨으로 깨어날 수 있기를 진심,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Sudden Light
- Dante Gabriel Rossetti
I have been here before,
But when or how I cannot tell:
I know the grass beyond the door,
The sweet keen smell,
The sighing sound, the lights around the shore.
You have been mine before,
How long ago I may not know:
But just when at that swallow’s soar
Your neck turned so,
Some veil did fall, - I knew it all of yore.
Has this been thus before?
And shall not thus time’s eddying flight
Still with our lives our love restore
In death’s despite,
And day and night yield one delight once more?
섬광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예전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어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인지는 알 수 없지요.
문 뒤편에 있는 그 풀밭을 알고 있어요,
달콤하게 코를 찌르는 향기, 한숨 소리와 바닷가를 비추던 그 불빛들도.
예전에 당신은 제 사람이었어요.
얼마나 오래 전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제비가 날아오르던 그 순간
당신은 그렇게 고개를 돌렸고
베일이 벗겨졌지요, 난 예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예전에도 이랬었나요?
이렇듯 소용돌이치는 시간의 흐름이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과 더불어
죽음의 어둠 속에서도 다시 회복되고
밤낮으로 다시 한번 기쁨을 주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