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외연
한 여자가 화구를 챙겨 들고 바다를 건너간다. 물론 배를 타고 간다. 파도에 배가 흔들리고 화구가 실린 목함은 바다에 떨어진다. 여자가 화구를 건져내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이처럼, 등장인물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물건을 소지하고 오지로 들어가는 모티프는 여러 영화의 장면에서 볼 수 있다.
‘피아노’에서 에이다는 자신의 피아노를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온다. 미션에서 로드리고 멘도사는 자신의 무구를 몸에 감고 고라니족이 사는 오지로 가는 폭포를 기어오른다. 이들이 가져가고 있는 물건들의 공통점은 현재 자신의 분신이거나, 자신이 내던져야 할 삶의 오류들이다.
화가 마리안느는 아버지가 유명화가이면서 그녀 자신도 화가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여성이다. 표정에서 드러나는 마리안느는 어둡고 진지하다. 그런 그녀가 그려야 할 대상은 엘로이즈, 섬에 시집온 후 고립되어 갇혀 사는 백작부인의 딸, 엘로이즈 역시 공간적 폐쇄 상태에서 살고 있다.
얼굴을 뭉개버린 초상화
첫 번째 완성된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너(마리안느)를 닮지도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마리안느는 전통적인 초상화 기법에 대해 설명하고 자신은 그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응대하지만, 엘로이즈가 생각하는 초상화의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생명이 없는 초상화는 존재감이 없다는 것이며 죽은 그림이라는 것이다. 마리안느는 충격에 휩싸인다. 지금까지 자신이 배우고 실천한 그림과는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를 엘로이즈가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다.
위버멘쉬 Übermensch의 탄생
놀랍게도 마리안느가 와 있는 이 섬에는 남자라곤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 (남자들은 감독에 의해 의도적으로 화면에 노출시키지 않고 있는 듯하다.) 마리안느가 이 섬에 들어올 때 짐을 들어줬던 일꾼, 그리고 다시 짐을 들고 이 섬을 빠져나갈 때 등장하는 짐꾼 남자뿐이다. 한밤중에 찾아간 마을 축제 마당에서도 역시 여자들 뿐이다. 여자들이 보여주는 완벽한 세계,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손뼉을 치며 합창하는 마을 여자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그들은 날 수 없다. 우리들은 그들에게 작게 보인다. 하늘을 향해 높이 올라가는 우리는 그들이 보기에 점점 작게 보일 것이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이 없는 현실에서 등장하는 현실적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이상적 인간, 니체가 바라는 이상적 인간형, 위버멘쉬의 모습을 형상화한 장면이다. 마을 여자들의 축제는 위버멘쉬들의 축제로 보인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다. 오르페우스가 왜 뒤돌아 보았을까에 대한 자기주장들, 하녀 소피는 돌아보지 말라는 계율을 어긴 오르페우스를 탓한다. 마리안느는 추억 때문이라고 말하고,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돌아보라(왜?)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개인의 의견은 그들의 현실에 입각한 자기 생각들의 상징적 표현이다.
소피의 말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에 대한 원망을, 마리안느는 지난 추억(사랑)을 잊지 못하는 자신의 기억을, 엘로이즈는 나를 바라봐달라는 존재론적 갈망(Here I am)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엘로이즈의 마음은 초상화 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엘로이즈의 미소
-당신은, 당황스러울 때는 입술을 깨물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당신은, 말하기 곤란할 때는 이마를 만지고, 심란하면 눈썹이 올라가고, 당황스러울 때는 입으로 숨을 쉰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처음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표출한다.
-당신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누구를 바라보겠나?
초상화를 그린다는 행위는, 마리안느에게는 관찰자(화가)와 피관찰자(모델)의 관계를 의미하지만, 엘로이즈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피관찰자인 엘로이즈의 주체성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의미, 관계의 재정립에 해당한다. 굳이 주체와 객체, 지배와 피지배,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관계, 사르트르의 ‘본질(초상화의 이론)' 보다 앞서는 실존(모델의 생명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동안 어떤 이유(언니의 죽음, 결혼 거부, 언니에 대한 죄의식 등 이 영화에 전경에 등장하지 않는 후경으로 사라지고 없는 동기들)에서건 가려져 볼 수 없었던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리고 엘로이즈가 찾은 대자적 존재로서의 즉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즉자적 존재는 타자에 의해 의식되고, 비로소 즉자-대자적 존재가 탄생한다. 비로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어리면서 초상화는 완성된다.
소유와 권력
-나를 조금 가졌다고 내 탓을 하는가?
엘로이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대자적 존재로서의 자아가 마리안느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항변이다. 마리안느가 보여주는 이율배반적 태도, 남녀 간(혹은 인간 사이)의 소유개념은 권력의 불균형 상태에서 나온다. 그것은 사회 시스템의 불균형에서 오는 것이며, 사회의 불균형은 대자적 자아의 단계가 초래하는 불균형이다. 그래서, 즉자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타인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는다.
불균형이 권력을 낳고, 권력은 소유를 가져온다. 엘로이즈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그 자신으로서의 가치와 스스로의 존엄성을 드러낸다. 이런 단호하고도 분명한 엘로이즈의 태도(예속, 종속, 소유, 구속을 말하는 마리안느에 대해 화를 내는, 있는 그대로의 엘로이즈 자신에 대한 존중과 믿음이 결여된 마리안느에 대한 질타)에 대해 마리안느는 당혹할 수밖에 없고, 어떤 대답을 찾아야 할지 스스로 답을 얻어내지 못하는 기득권자의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풍속화의 시점
여성이라는 신분이 주는 한계에 직면한 화가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가 제안하는 것, 지금 여기, 우리들의 현실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엘로이즈의 관점으로 보면, 가장 여성적이며 동시에 가장 피억압적인 상태에 놓인 여성의 현실을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낙태다.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일종의 고발이다. 이것은 북구의 풍속화가 장르화라고 불렸던 시절의 일상생활화에서 한걸음 더 나간 러시아풍속화가 추구한 풍자와 비판으로 나갔던 방식이다.
초상화에서 풍속화로 화풍이 변하면서 귀족에서 평민 이하의 인물로 모델이 바뀌게 되는 것은 노래에서 이야기로 문학이 전환되면서 주인공의 신분이 격하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핍박받는 여성을 여성화가가 그려내는 일, 이 일에 동참하는 여성들은 모두 주체적 존재로 사회화 의식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주류세계(남성, 제도, 법과 규정 등 모든 이데올로기적 요소)에 대한 환멸과 거부 저항, 피해의식 등 여성이 가지는 시대적 압박에 저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 풍속화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이 작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매우 아쉬운 점이다. 이 장면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로 취급해 버린 것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곳에 보다 직접적으로 접근케 하는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할 수 있었을 텐데, 결과적으로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시퀀스가 되고 말았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추억
마리안느는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남자)의 이름으로 출품해야 하는 자신의 작품 앞에 서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은 뒤돌아보는 오르페우스와 저승으로 사라지는 에우리디케의 이별 장면, 마치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이별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사실, 뒤돌아보지 말라는 전설적 신화적 속성은 도처에 등장한다. 소돔과 고모라가 그렇고, 며느리바위 민담이 그렇다. 뒤를 돌아보는 행위는, 과거에 대한 추억을 말하며 그것은 돌아보는 자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게 되는데, 마리안느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존재와 같다. 과거라는 시간의 추억 속에 산다는 것은, 아픔을 간직하고 고통 속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것을 잃은 자의 초상
질풍노도와 같은 비발디의 사계 여름 중 3악장이 극장을 가득 메운다. 음악은 격정적이다. 엘로이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예전의 생기를 찾을 수 없다. 마르고 초췌해 보이기까지 하는 엘로이즈의 얼굴 또한 감정의 요동을 감추고, 현생의 격정이 뺨을 타고 눈물로 흘러내린다.
폭풍우가 다가오고, 곤충들이 느끼고, 불안에 떨며, 그러다가 폭풍우가 번개와 바람과 함께...
마리안느가 짚어준 3악장의 동기들에 빠져 엘로이즈는 미소와 함께 흐느끼고 있다. 그녀 또한 과거의 추억으로 인해 슬픔에 빠져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랑을 잃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존재를 잃어서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본 순간, 시간은 멈추었고, 더 이상 세상은 돌지 않는 절망의 시간 속에 박제되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존재론적 본질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존재적 본질은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너’이며, ‘너’는 곧 ‘나’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퀴어’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래서 사랑을 잃은 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