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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Sep 24. 2024

Sorry We Missed You

ㅁㅣ안해요, 리키


  영화제목 ‘대면(배송)하지 못해 죄송합니다(Sorry, I missed you)’는 영국의 택배기사 리키가 물건을 대면 전달하지 못했을 경우에 문에 붙여 놓는 안내문의 양식에 써있는 표제 문장이다. 직접 대면해서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못해서 미안하고 대신 이 쪽지를 남긴다, 이런 뜻이다. 우리 역시, 그런 양식이 있다가, 문자로 대체되었다.(지금도 우체국에서는 등기일 경우, 그런 양식을 대문이나 우편함에 붙여 놓고 간다.)   

  사회적 서비스 개념을 국가와 기업으로 나눠 생각해 보면, 국가의 사회적 서비스는 공식적이고 표피적이다. 전달과 공지의 의무를 다하고 나머지는 이 땅에 사는 백성들의 몫이 된다. 공무원의 ‘성실의 의무’에 속한다. 법에 따른 공정한 절차만 있고, 감동의 정신은 없는 서비스다.

  기업의 사회적 서비스는 사뭇 다르다. 소위 영혼을 감동시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팔아야 하는 일을 할 때가 있다. 기업 간 경쟁이 그렇게 만들고,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다음 소희’가 생겨난다. 

  노동자의 현실은 세계 어디에서도 공통적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하고 레닌이 국제인터내셔널을 결성했던 이유가 그렇다.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구호는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리키가 영국에만 있겠는가.


  공산당선언(1848년) 이후 171년이 흘렀고, 코민테른 해체(1943년) 이후 86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왜 노동자의 현실은 산업화로 인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한 후 자체 모순에 의해 전복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변증법적 역사발전이 일어나 전 세계가 공산화되지 않았는가?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고, 그것을 유지하는 근간은 시스템의 공고함이고, 그 공고함은 여전히 노동자의 현실을 억압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살인적인 업무환경(시스템)은 자본에 의한 철저한 착취에 있다. 노동자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자본 고유의 속성이 그대로 반영된 현실에 있다. 이익의 최대화라는 경제논리가 비인간화의 주범이라고 한다면, 그건 자본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한다. 거기에 인간은 없고 오로지 도구로써의 노동자만이 존재한다. 


  리키(노동자)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러 가야만 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리키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사회의 바닥을 다 해본 경력을 가진 ‘흥부’ 같은 노동자다. 흥부가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아니었고, 온갖 잡일을 다 하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인물인 것을 기억한다면, 리키는 영락없이 영국판 흥부라고 할 수 있다. 주택담보대출도 갚아 나가야 하고, 아이들 교육도 시켜야 하며, 일하는 아내에게도 휴식을 주고 싶은 평범하고 성실한 가장이다.  

  그래서 돈을 더 벌어야 하고 좀 더 나은 작업환경에서 일도 하고 싶다. 재택 간호사 일을 하는 아내의 차를 처분하고, 지입차량을 할부로 구입해서 자영업자의 자격으로 택배일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수렁으로 빠지는 출발이 될 줄 몰랐다. 이 차는 자신의 차이면서 회사의 소유로 등록해야 한다. 그것이 시스템에 편입되는 조건이다. 또한 이 차에 가족이 동승하면 안 된다는 주의를 택배사 사장으로부터 듣게 된다면, 과연 리키가 사회 계급 어디쯤 존재하는 것인지 가늠케 한다.

  이쯤 되면,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리키는 자본가(혹은 소농=자영업자)에 포함되지만 절대 자본가가 될 수 없는 노동자임에 분명하다. 이건 시스템의 속임수다. 중산층이 아닌 집단에게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최면을 걸어 시스템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자기 최면의 속임수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든 일은 반드시 엎친데 덮친다. 리키의 택배일은 가정을 꾸려나가는 어떠한 가족생활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아내는 노인 돌봄을 위해 버스를 타고 다니고 있고, 사회의 목탁이 되고 싶어 하는지 뱅크시가 되고 싶은 것인지 아들은 불법 그라피티를 그리고 돌아다니며 학교에서 사고만 치는 문제아다. 아내는 늦은 저녁 식사 도중에도 일하러 가야 하고, 아들은 학교에서 정학을 당한다. 리키가 시간을 내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회사에 벌금을 물어야 한다. 거기에 진상 손님들까지 한 몫하고 있다. 

  소변볼 곳이 없어 소변통에 볼일을 보고 있는 사이 구타당하고 택배물건을 강탈당한다. GPS배송추적 단말기가 파손된다. 택배물건에 대한 보상과 단말기 배상을 리키가 고스란히 물어내야 한다. 폭행으로 인해 손가락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진 것 같지만, 엑스레이 결과를 기다리는 세 시간을 병원에서 마냥 기다리고 앉아있을 수 없는 형편이다. 빠진 시간만큼 벌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 기사도 내 돈으로 구해 메꿔야 한다. 한마디로 일을 하지 않으면 파산이다. 이것이 자영업자이면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현실이고, 그것은 시스템이라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리키의 가족이 겪는 불행은 어디서 오는가, 리키의 딸 라이자는 아빠가 택배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가정의 화목이 깨지고 오빠는 학교에서 정학당하고 가출하고, 아빠와 엄마는 언성을 높여 싸우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일을 누구보다 옆에서 열심히 돕던 라이자, 아빠가 일을 나가지 않았던 옛날로 돌아가면 예전처럼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라이자가 열쇠를 감추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장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상태로 강도당한 몸으로 운전대를 잡고 일을 나가는 리키의 차 앞을 막아서는 아들 셉, 이어서 정면으로 막아서는 아내 애비, 그걸 지켜보는 딸 라이자, 새벽 6시 반, 가짜 계급의 올가미를 뒤집어쓴 노동자 리키의 집 앞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리키는 감긴 한쪽 눈으로 차를 몰고 간다. 운전대를 잡은 그는 울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울음소리는 어둠 속에 묻혀 사라진다. 


   학습지교사 신분에 대한 행정소송, 전국화물연대의 파업, 쿠팡물류센터의 살인적 노동환경 등은, 한국사회의 대표적 시스템 착취이며 자본의 폭압적 지배구조를 상징한다. 거기에 정권과 결탁한 법체계를 마련한다면 이는 날개 단 합법적 착취와 폭력으로 이어질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 될 것이다.

  리키의 아내가 돌보는 치매노인들의 오물처리로 인해 애비는 코밑에 민트젤을 바르는 습관이 있다. 역한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한 자기 방어적 행동이다. 잠자리에든 애비에게 입맞춤한 리키가 코에 무얼 발랐냐고 묻는 말에 역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향기젤을 바른다고 대답하는데, 순간 리키는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 때문인 줄로 안다. 사정 얘기를 들은 리키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미안해요, 우린 당신이 보고 싶을 거예요.' 그들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우리 같은 리키들에게 남겨야 할 쪽지다. 우리가 우리에게, ‘연대’는 보증 설 때만 필요한 말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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