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Other Choice
감독 박찬욱
제작 박찬욱
원작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액스
출연 이병헌(만수) 손예진(미리) 박희순(박선출) 이성민(구범모) 염혜란(아라) 차승원(고시조)
촬영 김우형
편집 김상범
음악 조영욱
제작사 모호필름
배급사 CJ 엔터테인먼트
개봉일 2025년 8월 29일(베네치아 영화제) 2025년 9월 24일(대한민국)
시간 139분
일본의 고레에다가 보여주는 가족의 현존 혹은 실체는 단절과 파열, 불협화 이런 비일상적이고 반전통적인 것들이었다. 마치 그는 영화를 통해 가족을 해체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해체한 후 재조립하지 않은 채 분해된 형해를 관객에게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그려냈다.
박찬욱에게 가족은 파라다이스, 낙원 같은 개념으로 존재한다.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진 것, 숭고하고 순결무구해야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목숨바쳐 지켜내야 할 대상이자 영혼인 것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정신 속에 자리잡은 가족의 이미지는 고레에다에게는 이파리와 가지라면, 한국은 뿌리다. 하나는 무수히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고, 하나는 보이진 않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것을 생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이파리와 가지는 꺾고 베어서 없애버릴 수 있지만, 뿌리는 땅속에 숨어 언제든 때가 되면 다시 흙을 뚫고 올라올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잠시 존재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들과 그것을 있게 한 본체, 본질과 현상이라는 관계로 파악되는 이것은 사실,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분리할 수 없는 한 몸이다.
산뜻하게 밝은 구름이 무지개처럼 뜬 하늘 아래, 만수가 그의 가족을 끌어안고 시간을 카운트하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결속에 행복을 구겨 넣었다. 무형의 그것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묶어놓는 것, 놀랍게도 만수는 구범모의 시체도 그렇게 묶는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방법치곤 강제적이고 폭력적이다.
박선출의 집은 산장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미국식의 자연인이다. 만수의 집은 80년대 아파트 개발이 되면서 이주민 대책으로 지었던 이주단지에 건축된 단독주택이다. 개발이 불러온 획일화된 집단 가옥구조. 하지만 내부구조는 미국식으로 바뀌어 있다. 산장은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의 통나무집이고, 단독주택은 미국중산층의 호화로운 타운 하우스 구조로 바뀌어 있다. 그래서 두 가옥의 공통점은 서양식 내부 구조와 내장이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구범모의 집이 그나마 현실적인 한국형 전원주택에 가깝다. 이것도 어차피 서양식 구조의 가옥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사정이 같다. 이 전부가, 여기가 다 한국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니 만수의 콧수염도 빠다냄새가 난다. 그렇게 장면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화면 전체의 미장센이 한 눈에 잡히며 미국드라마의 안정된 톤과 색감이 영화 전부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가 국적이 있어야하는 법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엄연히 극적 공간이 한국이라는 점을 되새긴다면 박찬욱이 추구하는 현실 미학은 비현실적이다.
꼭 그래야하는 건 아니지만, 장어와 해고의 연결고리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제지공장에서 25년 일한 만수가 해고를 당하는 것은, 가족 부양이 불가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의 냄새를 맡아보자. 만수는 한번도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런 캐릭터가 늘 그렇지만, 올해의 자랑스러운 펄프맨으로 뽑힌 적이 있는 업계에서는 유능한 것으로 인정되는 '수상자'다. 편의점이나 외식업체에서 뽑는 자랑스러운 올해의 서비스맨 상이나 올해의 우수사원 상이라든가, 그런 종류의 상과 무엇이 다른가. 도대체 그런 시스템이 한국에 있기나 한가.
임원급의 사원이나, 말단 부서의 사원이나 동급이란 얘기다. 이것을 움직이는 거대한 톱니바퀴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다. 마르크스를 말해야 한다. 그러나 박찬욱은 이념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아니다. 땅을 파고 계속 파다보면 뿌리가 나온다는 것을 안다. 고레에다가 여기 저기 자꾸 땅을 파는 것은, 그 속에 무엇이 파묻혀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찬욱은 이미 뿌리를 상정하고 그에 어울리는 가지와 이파리, 꽃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니 인공적이고 작위적일 수 밖에 없다. 작업방식의 차이다. 이 방식의 차이가 결국,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 낸다.
해고가 불러일으키는 것, 불러오는 것, 닿는 곳은 가족의 뿌리다. 박찬욱은 애초부터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벽을 흔들면 집이 흔들리겠지만, 기둥을 흔들면 집이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뿌리를 사정없이 흔들어대기 위해, 해고를 일으킨다.
딸이 첼로 레슨을 못 받고, 아내는 테니스레슨과 댄스강습을 포기해야 하고, 아들은 핸드폰을 털기 위해 친구아빠의 매장을 도둑질해야한다. 한마디로 생활고다. 가족을 붕괴시킬 최종적인 최대의 위기가 그게 다다. 그리고 위기 파생의 종합적 상징물이 집이다. 아홉 번 이사끝에 마련한 내집, 이 집은 어릴적부터 살았다는 그의 동심이 만들어낸 낙원으로서의 집인 셈이다. 잃어서도 안되고 포기해서도 안되는 것들이 존재하는 그곳이 바로 가족인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집을 흔들고 기둥을 흔들어대는 것은, 만수로 하여금 가족이라는 뿌리를 붕괴시킬 위기에 직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가족의 붕괴를 막는 일에 월남전에서 얻은 아버지의 북한제 권총을 동원해야 하고,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집마당을 파야하는 일들을 고안해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 회사를 만들어 경쟁자들을 입사시키기 위해 이력서를 받아야 한다. 단지 한 사람의 해고가 연쇄살인범을 만들어내는, 이런 구조를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폐해라고 이름 붙일만 한가. 박찬욱은 켄로치가 아닌 다음에야, 그쪽으로 이야기가 발전하지는 않는다.
등장하는 배우들이 소위 A급들이다. 그럼, 이병헌은 A of A. 배우들의 라인업을 통해 퍼뜩 깨닫게 되는 놀랍고도 재미있는 사실은 한 명 한 명 모두에게 시선을 뺏긴다는 것이다. 뷔페에 갔더니 메인이 너무 많고, 초밥집에 갔더니 벨트를 타고 나오는 접시 하나하나에 눈이 휘둥그레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맛을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럼, 이건 국내용이 아니란 결론에 도달한다. 외국인에게는 이들이 한낱 변방의 배우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모든 배우들이 각자의 개성을 맘껏 발휘해서 각자의 무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서 각자의 연기에 충실한 옴니버스를 보는 듯한 재미도 있다.
거기에 음악도 한 몫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에서 시작해서 조용필의 노래까지, 한 번, 두 번, 어라? 하고 연속되는 사운드트랙들은 귀를 즐겁게 만들기에 충분하지만 눈은 즐겁게 하지는 못했다. 음악 역시 진수성찬으로 편쳐 놓았던 것이다. 관객은 이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멀티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몰입과 소격이라는 브레히트의 연출법을 충실히 적용한 것일까?
어쨋든, 살인은 아라의 활약으로 진실을 덮어 버렸고, 만수는 일상으로 돌아온다. AI가 지배하는 공장에 복귀한 만수, 예스!의 몸동작과 함께 쾌재를 외친다. AI가 지배하는 공장에 남은 유일한 인간이라는 은유와 상징, 그것은 대단히 시사적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비극을 내포하고 있다. 박찬욱의 비관적 세계관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행복을 되찾았지만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선 인간, 여기까지가 허리우드적 해피엔딩이라면 빅친욱은 엔딩에 하나 더 붙여 놓았다. 거대한 기계가 서슴없이 무차별적 벌목을 하는 장면, 인간의 세계는 자연을 파괴하며 이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무섭게 암시한다.
가족이라는 인간의 뿌리는 이렇게 생태계, 자연을 파괴하며 이루어진다. 나무의 뿌리를 도려내는 것처럼, 인간의 근간을 도려내며 생을 영위한다는 아이러니 속에 인간은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매트릭스의 세계를 깨달은 니오가 그를 키워준 인큐베이터 기계와 싸워야 한다는 것과 같다. 태생적 비극의 순환고리와도 같은 이 거대 아이러니 구조를 인간은 받아들여야 한다. 어머니인 자연과의 싸움에서 파생되는 종이를 생산하는 만수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머니인 기계를 죽여야만 인간의 세계가 사는 매트릭스의 구조나, 어머니인 자연을 죽이고 그 파생물인 종이를 생산하며 행복을 구가하며 살아가는 만수나, 다를 바 없는 자기모순적 존재인 것이다.
오히려 명작은 오점 투성이 일 수 있다. 보기에 거슬리는 것들이 복잡하고 생경하게 보이기 때문인데, 그 복잡한 것들이 인간의 머리로 해명이 될 때,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정리될 것이다. 우린 그것을 공식이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