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정다운
제작 김종신
촬영 박명진, 김종신, 정다운
음악 김선
제작사 기린그림
화면비 4:3
상영 시간 113분 (1시간 53분 27초)
대한민국 총 관객 수 23,568명 (2024년 8월 19일 기준)
상영 등급 전체 관람가
선유도 공원에 간 적이 있다. 한적한 길은 고요하고 쓸쓸한 폐허를 연상케 했다. 이질감, 하지만 그 이질감은 어디서 본 듯했다. 뜻 모를 기시감은 내 마음의 풍경이라기에도 너무 황폐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여기저기의 길을 걸어가 보는 일이 전부였다. 특이한 공원이라는 생각과 함께 잊었다. 그후에 TV 어떤 프로에서 할머니가 나와 선유도 공원을 만든 경위나 풍경 이런 것들을 이야기하는 프로였거나, 무엇을 소개하는 프로였거나 어쨌든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별스럽지도 않은 저걸 저렇게 TV에서 보여줄 거리인가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다만, 프랑스 장 지오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양치기 부피에나, 타샤의 정원을 관리하는 타샤 할머니 같은 사람이 한국에도 있나, 하는 무심한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연히 영화를 봤다. 이것 역시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얻어걸린 관람이었다.
선유도 장면이 나왔다. 선유仙遊가 선유船遊인 것 같은 부감숏을 보면서 쓸쓸했던 감정이 다시 살아왔다. 그런데 이 공간을 아이가 달렸다. 아이는 무념하게 그저 공원을 가로지른 길을 달리고, 계단을 오르내릴 뿐이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철원의 비무장지대에 있었다. 남쪽에서 가장 추운 북쪽의 끝이었다. 그때 나는 똑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전쟁으로 내몰려 아무도 돌아갈 수 없는 빈터로만 남은 마을, 80년대였으니 전쟁 이후 30년이 지난 세월이었다. 관개수로가 있던 그대로 홈을 따라 물이 흘렀고, 물을 따라 안 쪽으로 들어가면 그득담긴 수원지의 못물이 맑고 청청했다. 집은 흔적도 없었지만 집터였던 자리들은 그대로, 폐허가 되었던 그대로였다. 한껏 자란 다래가 사과만 한 것들이 열렸고, 머루를 따먹은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우리는 물가에 철모를 벗어두고 옆에 총을 눕혔다. 풀어진 방탄조끼 안으로 끈적한 땀이 배어 들었다. 고요한 수면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물을 퍼올려 머리 위로 끼얹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햇살을 받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이 손대지 않은 자연이 폐허 위에 생명으로 가득 찬 장면이었다. 그것을 재현한 것이 선유도공원이었다는 사실이 그대로 직감되었다. 이 할매가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정영선, 1941년생으로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조경학과 1회 졸업생으로, 대한민국 여성 조경기술사 1호에 빛나는 경력의 소유자다. 예술의 전당(1984), 샛강생태공원(1997), 호암미술관 희원(1997), 선유도공원(2002), 청계광장(2005), 경춘선숲길(2016), 아모레퍼시픽 신사옥(2016)의 조경이 모두 그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다. 2023년 9월에는 ‘조경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제프리 젤리코 상'(세계조경가협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연결사'라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을 단지 연결해 주는 사람, 미켈란젤로가 스스로를 '대리석 속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처럼 대가다운 품격의 소유자다. 또한 조경이란 업은 미래 세대에게 보여주는 행위라고 말한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가깝고도 먼 미래에 완성될 것은 단지 풍광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사람이 담겨야 할 그릇이 성숙되어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참된 가치가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우리는 정영선을 통해, 그가 만들어놓은 정원을 통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가 김정희의 발로 그린 우리 자신들의 얼개였다면, 정영선이 심은 나무와 꽃들은 대동의 땅(輿地)을 고유의 생명종으로 살아나게 한 것이니, 대동여지화大東輿地畵라 할 만하다. 한 분은 우리를 처음으로 알게 해 주었고, 또 한 분은 우리를 제 멋에 살게 해 준다. 이 땅에 생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다음은 그들의 고유 사상이 꽃피워야 한다. 유교 불교 말고, 우리의 고유한 사상은 우리의 생명에서 나온다는 것을 정영선의 국토, 정영선의 조경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 하나 탄생하여 꽃피우기 위해서는 몇 겹의 세대가 흘러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 사람과 자연의 힘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흰색 처리된 자막이 화면에 묻혀 보이지 않는 점, 4K UHD 고화질로 정밀하게 찍었다면 더 빛났을 작품이라는 점이다. 울트라고화질(UHD)에 16:9나, 2.39:1의 화면비로 바라보는 정영선의 사계를 상상해 본다.
-감독의 세계관이 상업적이지 않다는 점이 큰 위안이 된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그 무엇을 누군가가 지켜야 하고, 미래를 위해 헌신해야 할 사명을 누군가가 지녀야 한다면, 정다운과 같은 사람들이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