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 크리스테바, 이은선 역, 2022
한나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사랑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로 1929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1906년생이니까, 그녀 나이 스물 셋이었다. 그는 애초 신학을 하고자했으나, 철학을 공부하고 정치철학자가 되었다. 이책은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한나 아렌트에 대해 강의한 내용이다. 이렇게 사상은 늘 누군가에 의해 정리된다.
밥을 스스로 차려먹는 학자는 없다. 차려진 밥상을 유심히 관찰할 뿐이다. 그리고 남의 밥상도 뚫어지게 관찰한다. 그 결과물을 우리는 연구서라고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학자라고 부른다. 이런 시스템때문에 학자가 아닌 사람들이 사상공부를 하려면 대단히 복잡하다고 느낀다. 그 사람의 생각을 알기 위해 그 사람과 직접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중간에 그 사람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의 얘기를 또 들어야하는 것이다. 이건 거의 학문하는 전형으로 자리잡아서 뭐라 할 수없는 지경에 있다.
이렇게 세상이나 삶이나 정말 웃기는 일이 너무 많다. 아렌트가 수강한 일종의 스승 하이데거를 아렌트는 사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무려 유부남. 나치에 부역하고 대학 총장까지 따낸 하이데거로부터 결별하고 홀로코스트를 피해 1933년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삶에는 샛길이 많다. 우리도 샛길로 빠져보자.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무사히 넘어간 아렌트는 동료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편지를 받게된다. 자기는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호소하는 편지였다. 결국 벤야민은 자신의 말처럼 불안과 공포 속에 1940년 음독 자살하고 말았다. 병과 궁핍, 빛이 보이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또한 프랑스로 진격해들어오는 독일군대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확고히 알고 있었다. 스페인 세관에 의해 막혔던 국경은 벤야민이 죽은 바로 다음 날 다시 열렸다. 같은 국경을 넘어 한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었다.
아렌트는 1975년에 죽었는데, 그 전에 하이데거의 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임종을 할 것 같은데 당신을 보고 싶어 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부인이 남편의 애인을 오라고 하는 이런 관계가. 아렌트는 독일로 날아가 하이데거를 만났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으로 돌아온 아렌트가 병이 나서 죽었다. 아렌트의 장례식에 하이데거가 참석하였으니, 어쩌면 사랑하는 서로의 임종을 지켜본 최초의 커플이지 않았을까.
이 일화들은 인간의 삶을 너무도 핍진하게 잘 보여준다. 삶은 아무도 모르는 현상이며, 그 핵심은 죽음에 있다. 삶과 죽음, 이 두가지 주제는 서로 반대인 것 같지만 한 몸이다. 특히 하이데거와 아렌트에게 있어서는 더 그렇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순간만이 인간의 실존을 알게 해주는 절대적 지점이라고 했지만, 아렌트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기제가 바로 탄생이라고 했다. 아렌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더이상 죽음이 만들어 내는 공포와 허무에 허덕거리지 않아도 된다. 죽음은 탄생의 강렬한 생명성에 의해 삶에서 희석되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에게 '탄생'은 세상 모든 것의 초석이다. 탄생 이후 인간의 '행위'가 발생한다. 행위는 의미를 낳고 정치를 만들어 인간 사회를 발전시킨다. 그럼, 탄생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탄생을 만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사유한다는 것만이 인간이 유일하고 종사해야하는 발전이 된 셈이다. 그런면에서 아렌트는 철저한 관념주의자다. 결국, 사유는 사랑과 등가다. 즉 사랑이라는 사유가 세상의 희망인 탄생의 근원이 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의 귀착점으로 삼게 된다.
이런 공공과 사회성, 정치의 개념이 타인과 공유될 때 공동체가 의미를 가지며, 그 의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극대화시켜주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렌트에게 개인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또한 아렌트에게 정치는 자연과 반대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이 동물이 아닌 것은 자연으로부터 독립되어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의 사고를 했을 때만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간의 자연성을 말한 마르크스의 생각에 반대한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행위'라는 것을 해야 하는데, 인간의 행위가 집약된 매체가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기억을 붙잡아 둘 수 있고, 이것은 이야기를 통해 타인과 공유하는 기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유물론자의 근원적 사변과정을 보는 듯하다.
또 한번 샛길로 들어가 보자. 아렌트가 33년 독일의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로부터 탈출하면서 미국에 정착한다. 그녀는 시온주의자의 이스라엘에 대해 반대했다. 그리고 시온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비난 받을 것이라는 그의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1947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민들을 학살하고 70만명을 팔레스타인 땅에서 내쫓은 일을 '나크바'라고 부른다. 나크바는 팔레스타인 말로 '재앙'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홀로코스트를 부르는 'the Shoah'라는 말도 '재앙'이라는 뜻이다. 재앙을 서로 베푸는 개인도 없어야 할뿐더러, 재앙을 서로 안겨주는 국가나 민족도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학살이 난무하는 이 '재앙'의 결과는 옆에서 보기에 너무나 처참한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아렌트가 주장하는 인간의 가장 고도화된, 인간이기를 증명하는 행위인 공공영역에서의 '정치'가 최악으로 잘못 행사되고 있는 예를 우리는 지금 목도하고 있다. 학자가 왜 현실문제에 뛰어 들어야만 하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비판하지 않는 학문은 학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순수한 학문이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들의 텔로스, 만물의 근원, 인류 보편의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는, 학문은 왜 근원을 파고 들어야 하는지, 아렌트나 벤야민을 읽으면 19세기의 학문 경향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 정신만이 오로지 순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