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사. 1988
조형주의 예술이론은 문스터베르크 아른하임 아이젠슈타인을 관통해 흐른다. 이들의 의식을 줄곧 지배한 것은 제작과정에서 드러나는 혹은 숨겨져 있는 영화의 심리적 기제들, 인간 정신의 발현과정 등에 유추해서 어떻게 영화가 인간의 정신을 담을 수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영화만이 가지는 다양한 표현방식들에 주목했고, 그것들을 통해 영화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물리적 기반이 영화의 정신을 구축했고, 그것은 인간의 미학적 관심을 고취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조형주의자, 형식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다.
문스터베르크가 인간의 내면에 중점을 두고 그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하는 기법을 탐구했고, 아이젠슈타인은 조형주의자들의 재현주의가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벨라 발라즈 역시 재현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영화예술의 탄생기(1920-1935)에서 학문적 연구기(1960년 이후 지금까지)를 거치면서, 영화는 조형주의 예술론에 기반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만이 가지는 특징을 밝혀내기 위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 즉, 카메라, 조명, 편집, 음향, 색조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영화 현상을 해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형주의 영화이론은 러시아 형식주의(1918-1930) 이론과 닮아 있다. 조형주의자들이 인간의 행위를 실제적 기능, 이론적 기능, 상징적 기능, 미학적 기능의 네 가지 기능 범주로 나누어 살폈듯이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는 이러한 기능들을 활용하여 특별한 방식(낯설게 하기)으로 대상을 감각(지각)하는 과정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을 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때 대상이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예술의 도구로 자리매김한다.
예술이 사용하는 방식, 기교란 것은 일탈에 기초한 유리화(defamiliarization, 낯설게 하기)라고 부른다. 아울러 토마세프스키는 예술이 재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토리에서 구성을, 인과에서 동기를, 분리해 내고 모든 예술적 요소(아이러니, 유머, 파토스, 언어의 관념성 등)를 리얼리티의 의도적 왜곡이라고 밝혔다. 그런 측면에서 전경화(foreground)는 클로즈업으로, 리듬은 몽티주로 대치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벨라즈의 이론은 빛을 발한다. 초기 그가 집필한 '영화론'(1922)에서는 명확하게 조형주의 이론을 따른 면이 있으나 특별한 점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영화의 경제적 하부 구조를 분석했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의 형식 언어라는 개념을 만들어 영화가 연극과 다른 점, 혹은 연극의 재현과 다른 점을 집중 논의하면서 대사에 의존하지 않는 시각적 묘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것은 생활의 모든 보편적 경험들이라고 했다. 이들 경험은 변형가능한 영화적 대상들이라고 보았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소재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찾아내는 재능과 정력을 지닌 자들을 위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의 영화론의 중심에는 다른 조형주의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표현기법이 있었다. 특히 발라즈는 음향에 대해서도 편집의 방법으로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향에도 몽타주 기법을 적용한다는 생각은 발라즈만의 독특한 생각이었다.
어떠한 도구를 사용하든 좋은 편집이란 그 결과물을 통해 생각의 연쇄가 일어나도록 해야 하며 그를 통해 인간 '내면의 언어'를 보여주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디졸브, 페이드, 와이프 등의 기법)
그런 면에서 발라즈는 형식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각종 영화의 표현 기교는 다름 아닌 영화의 형식들이며 그 형식들을 통해 의미를 전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장면들을 편집해서 제작자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자연에 인공을 가한 것을 몽타주라고 말할 때, 당시 자연을 자연 그대로 찍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바쟁류의 리얼리즘 영화 철학과는 배치되는 지점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롱테이크가 예술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오늘날의 영화 취향과는 반대된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바쟁은 영화의 종류에 관계없이 영화는 극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강조되는 기법이 클로즈업이다. 극적이라는 것은 서술적이어야 한다는 것인데, 기록 영화나 아방가르드 영화들이 그렇지 못한 점에 대해 비판했다.
영화가 보여주어야 할 것은 어둠에 묻혀있던 것에 조명을 주고 세상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예술로서 가치를 가지려면 표현기교, 창조적 잠재력, 구성 같은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다른 예술이 차용하고 있는 것과는 엄밀하게 다른 영화만의 독창적 표현 기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대상(소재)으로부터 의미를 창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대상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추적하고 노출시키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 영화제작자이며, 예술가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