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란파페, 유강은역, 교유서가, 2025
-분쟁의 전사
19세기 말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50만명이 살았다. 그 중 무슬림이 70%, 기독교도와 유대인도 섞여 살았다. 아랍어 방언을 사용했고, 독자적인 의복 문화가 있었다.
19세기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될 때 범아랍 통일기획에 동참하는 등 민족형성의 연대를 일으킬 기회가 생겼으나 튀르키예의 청년 오스만운동이 일어나 이슬람 민족주의 운동의 반동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천년 튀르크당이 집권하자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때 루히 알 칼리디, 나지브 나사르 같은 선구적 인물이 등장했다.
-유대인을 결집시킨 동기(시온주의의 본격화)
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 땅이 근대화되고 있었으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대인 문제가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유대 시온주의는 유럽 지역에서 행해진 유대인에 대한 폭력과 집단학살로 이어진 반유대주의에 대한 저항에 기원한다. 기독교 시온주의는 그리스도 살해라는 종교적 핍박에 근거를 두고 발생한 것이다.
유대인 노동자로 이루어진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통해 폭압적인 반유대세력(자본주의)을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러시아 차르의 유대인 집단 학살에 반기를 들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면 그들과 동등한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때,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운동(시온주의)을 결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나. 당시 유럽 국가들의 민족에 대한 각성은 유대인들에게도 구약을 종교가 아니라, 역사적 문서로 해석하게 만들었다.
오스만이 물러가고 영국이 위임 통치하기 시작하자 초기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영국에게 지주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쫓아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였고,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는 대학생, 지식인으로 이루어진 초기 이스라엘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기 위한,
1단계 <준비기>
테오도어 헤르츨은 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을 위한 조국'을 세운다는 강령을 채택한다. 1905년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우간다 이주 계획이 거부되면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 위치가 되어 버렸다.
다비드 벤 구리온, 메나헴 우시슈킨 등의 유대인 지도자들의 기록에는 애초부터 팔레스타인인이 없는 팔레스타인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헤르츨의 뒤를 이은 하임 바이츠만은 영국과 미국에 친시온주의 로비 집단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오스만에 맞서는 중동전초기지가 팔레스타인이라고 설득하고자 했다.
2단계 <운동기>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자, 영국은 아랍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하심왕가에게 오스만,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 맞서준다면 아랍 세계를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다.
바이츠만은 기독교인(유대인은 유대인의 땅으로 가야 한다고 믿는 종교인), 반유대주의자(유대인을 영국에서 몰아내야한다고 주장하는 집단), 영국 유대인 귀족(공산주의자인 노동계급 유대인을 멀리 쫒아 버리고 싶은 집단)들로 이루어진 친시온주의 로비집단을 결성하였다. 결국 제국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이 필요했고,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은 종말을 당기기 위해 팔레스타인이 필요했다. 거기에 유대인 지도부는 러시아 유대인의 안전한 피난처가 필요했다. 이제 유대인의 집단은 종교가 아니라 민족 집단으로 거듭나야 했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유대 민족의 국가였던 것이다.
1917년 밸푸어선언=영국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유대인 비공식 지도자인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편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수립 약속을 했다.
191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위임 통치하기 시작했다. 국제연맹이 영국에게 '유대인의 이주를 용이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영국이 만든 팔레스타인 헌법에 의해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의 조국으로 약속 받았다. 이 과정에 팔레스타인인의 권리와 존재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영국의 위임 군사통치 기간(1918-1920)에 밸푸어 선언에 저항하기 위한 무슬림-기독교인 연합 협회가 조직, 1919년에는 팔라스타인 아랍 회의가 결성되었다. 이는 팔레스타인 땅에 민족주의의 역사는 없었고, 팔레스타인인은 존재하지도 않았다(골다 메이어)는 주장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사실이다.
1921년 영국인들은 최고 무슬림 평의회를 설립, 그러나 하지 무함마드 아민 알후세이니가 의장이 되어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1920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국에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팔레스타인인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반동 세력이 등장하여 행동하기 시작했다. 야보틴스키가 이끄는 시온 우익집단이 예루살렘의 무슬림 지구를 관통해서 행진하는 행사를 했고, 이들은 이미 무슬림의 성지를 파괴하고자 하는 선동 기사를 신문에 내보낸 사회적 불안을 조성한 바 있었다.
1921년에 행진이 다시 시작되고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유대인 47명, 팔레스타인인 48명이 사망했다.
이후 유대인의 국가 건설은 영국 위임통치의 적극적인 협력에 힘입어 독자적인 원형 국가가 건국되었고 팔레스타인은 졸지에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 교사 양성 사범학교에 대한 지원은 상반된 궤도를 달렸고, 더 놀라운 것은 준군사 집단인 하가나의 설립을 영국이 승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주민들의 노동 문제에 있어서는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부분 부재지주의 땅을 유대민족 기금으로 구입한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그 땅의 농민들을 내 쫓았다. 이전에 지주끼지의 토지 거래에서 소작농들의 삶이 보장되었던 것에 큰 변화가 생겼던 것이다. 이에 관한 법률을 영국이 바꾼 것이다. 여기서부터 정착 식민주의가 생겨났다. 정착 식민주의란 땅을 근대화한다는 논리로 땅에 연결된 모든 것을 백지화해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게 만들어야한다는 논리다.
유대인이 스스로 노동하는 생산방식을 고집하는 '사회주의적' 시온주의 단체로 인해 팔레스타인 땅의 소작농들은 도시로 쫓겨났다. 1920년대부터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이스라엘의 종족청소가 시작되었다. 30년대로 들어서면 폭력충돌이 빈번해졌고, 양쪽은 영국당국과도 충돌했다.
알부라크 혁명:
29년 8.15 무슬림 금요기도 후 유대인 17명 살해가 원인으로 작동하여 유대인 133명, 팔레스타인인 116명이 충돌로 사망했다.
헤브론 학살, 아브라함을 모시는 성지 헤브론은 두 집단의 평화 공존지였다. 젊은 시온주의자들에 대한 반감과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폭력에 대한 흉흉한 소문으로 외곽의 무슬림들이 습격하여 유대인 67명을 학살했다.
알카삼(1882-1935)의 등장프랑스 식민 시절부터 무장투쟁하며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하여 하이파에 정착 설교, 교육 활동을 하며 군사조직을 창설영국에 투쟁하였다. 알카삼의 죽음 이후 젊은이들이 대거 투쟁대열에 참여하였고 가라져 있던 팔레스타인 조직들이 답합하기 시작했다.
29년 사태 이후 영국은 자체 조사단을 파견하여 백서를 발간하였다. 이 백서는 더 이상 유대인을 이주시켜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보고했으나, 총리 램지 맥도날드는 이 결과를 뒤집어 버렸다. 모두 하임 바이츠만의 로비 공작 때문이었다. 이후 아랍 세력은 아랍고등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3년간 백방으로 투쟁하였으나, 영국은 공습을 감행해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폭격하고 수천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들에게 돌아간 것은 협상과 화해, 진실과 정의가 아니라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격이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팔레스타인 국경을 걸어잠궜다. 이는 피난처가 없었던 유럽의 유태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어쩌면 홀로코스트는 유태인들에게 남겨진 필연적 결과였을 줄도 모른다.
홀로코스트를 당한 유태인들은 모든 게 확실해졌다. 그들을 지켜주는 땅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꺠닫게 된 것이다. 1942년 5월 뉴욕 볼티모어 호텔에서 시온 지도부가 모여 팔레스타인 땅 전체를 유대국가로 만들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아랍 고등 위원회를 불법단체로 지정한 영국은 하지 아민을 의장 직에서 해임하고 체포하려고 했으나, 아민은 탈출하여 독일로 입국했다. 독일에서 아민은 이슬람 결집 방송을 했고, 이것은 네타냐후가 홀로코스트 발상을 아민이 제안한 것이라는 음모론을 주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이 유대인 학살에 느끼는 죄책감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느끼는 미안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미 유럽에는 유대인들이 돌아갈 집이 업었던 것이다.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나고, 48년까지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한다. 이 3년간 팔레스타인 시온주의를 화햇히키려는 노력은 실패했고, 아랍세계의 시도도 실패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온주의자들은 종족 청소를 준비했다. 이는 48년 영국이 철수하자 마자 나크바로 이어진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외교적 노력의 실패
영미위원회가 구성되어 조사보고서를 채택하였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했다. 시온주의자들의 국가 건립,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영국의 감독을 연장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이는 두 진영 모두에게서 거부되었다. 이런 영국의 뜨뜻미지근한 자세는 시온주의 과격투쟁단체 이르군(Irgun)이 영국위임통치령 중앙본부를 폭파 91명을 살해하는 일에 이르게 한다.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 위원회가 파견되어 분할 권고안을 제출했다. 권고안을 팔레스타인은 반대했고, 독립한 다른 아랍국가들처럼 완전한 독립국가를 원했던 것이다.
아랍세계의 탄생과 분열
영국은 하심왕가에게도 독립국가건설을 약속했으면서도, 사우드 왕가가 하심가와 싸워 헤자즈 땅을 점령 했을 때 개입하지 않았다. 동맹으로서의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이다. 앞선 밸푸어 선언, 사이크스 피코 협정을 통해 보더라도 영국의 외교정책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행위와 조약을 일삼았다. 도덕성과 신뢰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외교정책이다.
헤자즈를 차지하고 있던 샤리프 후세인에게는 장남 압둘라와 동생 파이살이 있었다. 파이살에게는 시리아를 세워 주었고, 압둘라에게는 이라크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했다. 파이살의 독립전쟁은 결국 프랑스에 패전하여 무산되었고대신 이라크 국왕에 추대되었다. 형 압둘라는 시리아를 해방시키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카이로 회담에서 영국은 압둘라에게 요르단을 받았다. 이것이 아랍제국의 독립국가 건설의 과정이었다. 제국주의 연합국의 영토 분할, 영국의 결정에 의해 독립국가가 건국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압둘라는 피아 할 것 없는 실용노선을 추진해나갔다. 시온주의자들과도 유대를 가졌고, 팔레스타인 지도자와도 유대를 돈독히 했다. 이것은 비옥한 팔레스타인 땅에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요르단과 시온주의 우파들은 오르단을 미래의 유대국가로 받아들였다.
시온주의의 여러 전략, 1945-1947
영국군이 철수한 자리에 그대로 시온주의자들이 점령했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다수의 토착민임을 믿고 안일하게 대처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는 결의안 181호를 표결 통과시켰다. 팔레스타인 분할 찬성안이었다. 팔레스타인인에게는 이 날이 진짜 나크바가 시작된 날이다.
소수안은 연방정부를 설립하여 유대와 아랍국가로 분할 통치한다는 것이다. 투표에 의한 연방 정부 수립, 유대국가에 이민을 허용하자는 안으로 두 국가를 모두 인정하는 격이니 이스라엘의 점유를 인정하고 국가까지 인정하자는 셈이다.
다수안은 아예 처음부터 두국가를 인정하자는 안이다. 소수안이든 다수안이든 유대국가에 대한 인정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영국 할 것 없이, 소련까지도 유대국가를 인정했다. 팔레스타인은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부조직도 없고 마땅한 군대 조직도 없었다. 결국 영국의 위임통치를 인수할 자원이 턱없이 없었고, 군대를 파견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그 권리를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스라엘은 바깥으로 미국의 신탁 통치안에 강력한 로비로 막아내고, 안으로는 종족청소를 위한 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밴구리온이 주도하는 비밀조직, 하가나의 정보조직들이 플랜 달렛(Plan Dalet)을 작성하고 실행에 옮겼다. 마을을 세 방향으로 에워싸고 토끼를 몰듯 열린 방향으로 몰아나가 주민들이 스스로 탈출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 후 마을은 폭파하여 다시 돌아 올 수없도록 만들었다. 18세-48세의 남자는 사살 체포하였고, 아랍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을 체포하거나 현장에서 처형하여 철저한 복수를 감행했다.
1948년 4월 9일 이르군과 스턴갱은 데이르 야신 마을을 습격하여 여자, 어린아이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죽였다. 주변 마을에 주는 메시지였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나크바를 조장했다.
이웃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있었으나 이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시온주의자를 대적할 수는 없었다. 이제 막 신생국가였던 그들도 여력이 없었고, 가장 많은 군대를 보낸 이집트조차 훈련과 장비 모두 부족한 군대였다. 가장 막강했던 압둘라의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실용노선이 어느 한편을 확실히 지원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떄문이었다. 결국 정규군과 지원군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원한 아랍세력은 미약한 대항에 그쳤고 그러는 사이 이스라엘은 이미 팔레스타인 대부분을 차지해 버렸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으로 쫒겨났고, 하물며 이집트는 난민의 집단 유입을 막기 위해 국경을 봉쇄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자에 이들을 몰아넣었다. 팔레스타인 전체 땅의 2%에 불과한 면적이었다.
실패한 첫번째 평화시도, 1948-1949
인종 청소가 자행되고 있는 가운데, 스웬덴 외교관 폴케 베르나도테 백작이 내놓은 중재안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기 따으로 돌아가고, 인구비율에 맞는 분할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스턴갱은 48년 9월 그를 암살함으로써 가장 합리적인 중재안은 파기되었다. 유엔은 결의안 194호를 채택하고 난민의 귀환, 예루살렘의 국제 관리, 47년 경계선을 기반으로 한 두 국가 체제를 지지했다. 실행을 위해 조정위원단을 설립했다.
이스라엘은 49년 5월 스위스 로잔 평화회의에 참가 함으로써 유엔정식 회원국 자격을 얻었다. 여기서 조정위원단의 요청한 의정서에 사인한 이스라엘은 유엔 가입후 의정사 사인을 부정하면서 유엔의 중재안도 거부하며 47년 국경을 확인하는 것으로 협상은 끝났다.
50년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가 발족하여 난민들의 생활을 돕는 한편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암만 등지에 난민촌을 건설하였다. 나크바로 인한 난민의 발생 뿐 아니라 이스라엘 내에서 발생한 난민도 30만이 넘는 현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재집결을 방해하여 단일민족 공동체로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이스라엘의 계략이 숨어 있다.
-자기네들이 유럽 전역에 흩어져 살았던 것처럼, 자신들과 똑같은 민족 소개를 시켜버린 것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나크바의 뜻이 '재앙'이라는 데는 또 하나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홀로코스트(번제의 의미에서 파생하여 대학살, 대파괴의 뜻으로 사)를 유대인 자신들은 Shoah라고 부르는데 이 말의 뜻 또한 '재앙'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당했던 것을 고스란히 이민족에게 넘겨주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비극이다.
나크바를 목격한 국제사회는 침묵과 수수방관으로 일관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이 때 촉발된 종족청소를 계속해 오고 있다. 이에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침략 방식을 정착민 식민주의로 규정하고 48년부터 67년 육일정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스라엘 내 종족청소를 지속하고 마을을 파괴해 나갔다.
이스라엘 내의 군정, 1948-1966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군정으로 통치했다. 이는 영국이 남긴 유산으로 이유없는 추방, 집에서 내쫒기, 재판없는 구금, 총격과 사업장 탈취 등이 군부에 의해 자행되었다. 56년 10월 통금이 내려진 카프르 카심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귀가하던 농부 49명을 통금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총격을 가해 사살했다.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나머지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들, 1948-1967
이스라엘의 폭압적 정책에 맞서 팔레스타인은 '페다인'(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된 이들)이라는 게릴라부대를 만들어 저항했다. 민간이 3명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53년 샤론의 101부대는 카비아마을을 공격하여 69명을 살해했다. 55년에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시나이전쟁을 일으켰다. 57년 파타(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을 아랍어로 뒤집어 읽은 명칭)가 조직되고, 64년 아랍연맹은 민족 평의회를 소집하고 여기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창설했다. 65년 1월 파타는 이스라엘 요르단을관통하여 이스라엘에 물을 공급하는 송수로 폭파 작전을 행동에 옮겼으나 실패했다.
급진적인 팔레스타인인들은 좌파 범아랍 민족주의 운동 집단인 카우미야 알아라비야에 가담하게 되고 여기서 팔레스타인 좌파그룹이 탄생한다.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 민주전선이 그것이다.
아랍의 유대인
이스라엘 지도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정착민을 늘려나가야 했다. 미국과 영국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올 필요가 없었고, 초창기 이주 정착민들은 유럽에 산재하고 있던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그래서 중동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이주 정착을 부추길 필요가 있었다.
먼저 이라크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 모사드가 공동체 중심지에 폭탄을 설치하여 자신들의 공동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불안을 조성하는 음모를 꾸몄다. 이라크 총리 알사이드외 비밀협정은 맺어 유대인 이민을 부추기는 입법을 시행하였다. 유대인들의 자산과 자본을 이라크가 가로채기 위한 것이었다.
예멘 유대인은 순진했다. 독실한 유대인 사회건설, 현대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하고 있다고 회유하고 꼬드긴 것이다. 67년 육일전쟁이 끝나자, 북아프리카, 시리아, 레바논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가는 이민이 줄을 이었다.
이집트에서는 도서관 영화관을 표적으로 테러를 자행했고,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떠나야만 했다.이 작전의 명령을 내린국방장관 핀하스 라본은 혐의를 부인하였고 이스라엘과의 평화 시도도 좌절되었다.
결국, 시온주의 지도부는 이렇게 떠밀려온 아랍 유대인들을 열등한 시민으로 신분을 격하시키기 위해 검역과정에서 DDT를 분사해 모욕을 주는가 하면, 가족을 분산시켰으며, 히브리어로만 교육하여 의식화 교육을 시행하였다. 또한 이들 집단을 국경 외곽으로 보내 국가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게 ㅁ나들어 가난한 국경 소도시에 재정착하게 만들어 차별화 했다. 유럽출신 유대인은 엘리트라고 인정하였고, 이런 사회적 대우를 받기 위해서는 아랍의 흔적을 지워야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66년 11월 이스라엘은파타를 공격하기 위해 요르단 영토 사무 마을을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요르단 병사 15명, 조종사 1명이 죽었다. 주변국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정부는 이스라엘이 시리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 공포는 67년 6월 5일에 현실화 되었다. 전쟁 발발 6일만에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골란고원을 점령한 것이다. 주변국의 참패를 넘어 국가 존망의 위기까지 걱정되는 공포의 지경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골란고원의 주민들을 시리아로 쫓아냄으로써 종족 청소는 끝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68년 라빈이 총리였던 시절 구시 카티프라는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대이스라엘이라는 개념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목표다. 여기에는 과거 구약시대의 성지들이 모두 포함된다. 베들레헴, 예루살렘, 헤브론 등지는 이스라엘의 '민족의 심장부'로 불리는 지역이었다.
과거 압둘라가 차지한 요르단 강 서안에서 가자에 이르는 지역을 재분배할 필요가 있었다. 67년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 30만명을 제거했다. 또한 점령지 팔레스타인인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음으로써 이들을 어떤 법으로도 보장할 수 없는 비시민권자-추방되어야할 외래자로 무자비한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갈릴리 땅의 팔레스타인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갈릴리에 정착촌을 세우고 토지를 몰수했으며 군사기지를 세워 갈릴리의 팔레스타인인을 내쫓았다.
기존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방침은 팔레스타인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요르단에게 넘겨주고 거리가 멀더라더 팔레스타인인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이스라엘이 넘겨받았다. 그렇게 해야만 남은 팔레스타인인을 몰아 내는데 수월하다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그런데, 이런 정부의 정책은 꼼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내 알아 차릴 수있다. 구시 에무님같은 극우 신자 집단이 하는 새로운 메시아 운동의 주장을 보면, 국가에서 지정하는 정착촌 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곳에 가서 살 자유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에무님은 팔레스타인인이 가장 밀집한 요르단 서안 지역에 정착한 것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방임으로 일관했다. 이스라엘의 사악한 민관 합작은 이런 식이었다.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종족청소를 해나가는 과정을 보건데, 이들은 고도의 술책으로 단계화 지능화 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력침공으로 점령->사이 좋게 해당국가와 분할->정착촌 건설->원주민 학살 추방, 이런 단계별 전술로 땅을 취하지만 이들의 방법은 모두 국제법상 불법이다.
점령에 눈감는 국제사회
63년 이전 미국은 그래도 이스라엘의 영토확장에 따른 폭압적 정책에 대해 비판하며 충돌을 보였지만, 63년 미국 이스라엘 공보위원회라는 압력단체가 결성된 이후는 미 행정부가 이스라엘의 행위를 막는 어떠한 조치도 못하게 만들었다. 그 사이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물길을 이스라엘 쪽으로 돌렸고, 67년 육일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은 동예루살렘을 병합했다.
6일 전쟁 후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242호를 채택하고 점령지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일부 철수라고 자기식 해석을 이후 벌어진 전쟁과 대처에도 똑같은 양상이 되풀이 되었다. 안보리 338호 결의안은 앞선 242호 결의안을 실행하라는 되풀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987년 1차 인티파다 발생.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 트럭과 팔레스타인 승용차가 충돌하면서 기폭, 비폭력 저항운동을 1993년까지 전개하였다.
1991년 마드리드 회담에서 두 국가 해법이 등장했으나 미국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을 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둘 다 반대했다.
1993년 오슬로1 협정, 이스라엘은 요르단강 서안 40%의 땅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발족을 인정하고, 자치정부는 이스라엘 기관과 협력한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자치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기존의 의결기구인 민족 평의회와 입법 평의회가 나란히 의회로 구성될 것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핵심인물들과 저항새력들은 오슬로1 협정을 거부 정부 참여도 거절했다. 좌파 세력들이 이 협정에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하마스 지하드 모두 자치정부 참여를 거부했고 다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로 들어가는 것도 거부했다. 저항운동은 분열했다.
하마스의 부상(이슬람 저항의 약자.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상징), 1928년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지부에서 출발. 1987년 무장단체 설립 결정, 셰이크 아메드 야신 이슬람국각를 건국해 이스라엘에 저항할 것을 호소. 하지만 하마스는 정항과 세속적 좌파 세력간에 균형추역할 을 했고 이스라엘은 이를 이용하기 위해 하마스를 지원했다.
지하드 또한 형제단 운동에서 탄생, 81년에 창립되었다.
1995년 9월 오슬로2 협정, 팔레스타인인에게 허용된 서안의 땅은 A지역 18%에 불과했다. B지역은 이-팔 공동 통치구역으로 사실상 이스라엘 통치지역이었다.(가자지구 통치방식) C지역은 유대인 정착지로 팔레스타인인의 출입을 제한했다.
이런 절충안들을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은 좋은 출발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유대인 정착민들은 전례없는 폭력사태를 발생시켰고,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버스, 쇼핑몰을 공격했다. 여기에 이스라엘 우파도 이 협정으로 반대했고, 설상가상 11월에 이스라엘 총리 라빈이 암살당했다. 새로운 총리 네타냐후는 우파의 지도자로 모든 지역 사이사이 수백 곳에 감시초소를 설치했다. 그리고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에 시비를 거는 방식으로 통제해나갔다. 가자지구에 철조망을 치고 가자를 거대한 교도소로 만들었다.
대예루살렘 계획, 예루살렘의 파레스탄인인들을 요르단 서안으로 강제이주시키고 이마을을 C지역으로 편입하는 방법으로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냈다. 네타냐후 임기 초기 59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앴다.
1998년 와이강 각서(C와 B지역의 극히 일부를 A에 편입시킬 떄 저항하지 않겠다는 내용)에 아라파트와 네타냐후가 서명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요르단 강 서안지역 식민지화의 방식, 노동당은 팔레스타인인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지역에 정착민을 이주시키나, 에무님은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에 정착하는 방식을 씀. 이는 정부와 민간이 서로 다른 방식을 선택한 셈인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행정부와 우파 민간단체간의 비밀 협약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부는 국제적으로 비난받을 일을 피하고, 대신에 민간단체에서 충돌을 일으켜 문제화시키면, 자국민 보호를 위해 정부가 출동하여 민간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탄압과 살육을 저지르며 자연스럽게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는 전략이다. 우리로 유추해보자면, 자유당니나 군부독재시절에 날뛰었던 반공 유익단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신도시를 건설하고 우파 지도자(랍비 메이르 카하네)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이주민을 받아들인다. 구시가에는 메시아주의자들이 정착한다. 이런식으로 이스라엘 우파들이 상업 수도 헤브론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행한 침략과 폭력에 군부는 눈을 감았다.
1997년 1월 헤브론 재배치 의정서, 헤브론을 H1 H2 두 지역으로 나누어 팔레스타인인과 유대인을 구분하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무력함을 드러냈고, 결국 팔레스타인의 미래는 이스라엘과 그에 저항하는 세력에 달려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1999년 에후드 바라크의 노동당 재집권.
2000년 여름 클린턴의 압력으로 캠프 데이비드에 모였지만 미국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협상에 아라파트는 돌아섰다. 몇 주 뒤, 이스라엘 야당지도자 샤론이 무슬람 성지 하람 알샤리프를 돌연 방문하여 충돌을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2차 인티파다가 터졌다.
팔레스타인인 13명이 시위중 총격으로 죽었다. 이에 하마스는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모인 호텔에 폭탄을 터트려 30명이 사망, 14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은 도시를 공습 폭격했고, 난민촌 주민을 학살했고, 아라파트를 구금했다. 이후 중병을 얻은 아라파트는 2004년 11월 사망했다. 독살설이 돌았다.
아라파트의 후임 마무드 아바스는 무장투쟁을 완전히 포기했다. 자치정부는 내치에 힘쓰며 안정을 취하려 했지만 하마스와 지하드 같은 폭력 정치 집단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아라파트 사후(오슬로 현정 이후) 평화와 중립을 주장하는 자치정부파와 하마스 지하드로 대표되는 무장투쟁파로 완전히 2분화 되었다.
2003년 이스라엘 의회는 국적 및 입국법(이민법)을 제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시민과 결혼으로 시민권획득 및 체류허가는 불가하다. 이스라엘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계는 배우자와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2018년 유대민족국가 기본법이 제정되어 아랍어를 주언어에서 부속언어로 격하시켰고, 예루살렘ㅇ리 이스라엘의 수도로 격상되었다. 정착촌확대가 장려되었으며, 해외에서 들어오는 이주민에게 시민권 획득 우선권을 주었다.
2011년 '나크바'법을 통과시켜 정부 공식기관이 나크바관련 기념(행사)을 하는 경우 예산 전액을 삭감하고 그 직위도 박탈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5.18 관련법을 제정하면서 기념식하는 개인 기관은 예산 전액 삭감과 함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해임하겠다는 것과 같다.
유대민족기금은 전 국토의 97%를 직간접으로 소유하게 만들었다. 유대민족기금 헌정에는 비유대인의 토지거래를 금한다. 심지어 베두인족은 1950년 식생보호법에 따라 농사와 방목을 할 수없게 되었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도시로 몰렸으며, 스스로 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했다. 2011년 베두인족 4만-7만명을 내쫓았고, 아라키브 마을에서는 40차례에 걸쳐 마을을 파괴했다. 그러나 그들은 매번 마을을 재건했다.
2002년 아랍연맹은 아랍평화안을 내놓았다. 비록 난민 귀환권(나크바)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두 국가 해법이 담긴 제안이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거부했고, 미국은 이스라엘에 끌려갔다.
미국, 유엔, 유럽연합, 러시아. 4자회담 기구가 분쟁의 중재자로 대두되었다. 놀랍게도 이들은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폭력 테러로 규정하고 평화를 가로막는 주범이라고 인식했다. 이들이 제시한 협상안도 실패했다.
아라파트 사후 무장세력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특히 하마스는 2006년 총선에서 44%를 득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스라엘 쪽에서도 샤론은 더 극단적인 카디마당을 창설했다.
가자지구에서 손을 뗀 이스라엘, 2005
2003년 가자지구에서 샤론은 손을 뗀다. 그러자 정착민들은 반발한다. 샤론은 중재하며 영웅이 된다. 그러나 가자지구 철수는 요르단강 서안 확보를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가자지구에 유대인을 남겨두지 얺음으로써 이스라엘은 가자를 외부에서 무차별 공격할 수있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점령 모델이다.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하니예정부를 구성하려했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의 압력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갈등이 키웠다. 이에 하마스는 파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가자지구를 무력 장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평화를 향한 마지막 시도, 2006-2009
2006년 샤론이 쓰러진 후, 2006년부터 2008년 사이의 이스라엘 올메르트 정부는 아랍연맹 계획안을 수용하고자했으나 이 또한 팔레스타인 독립정부에 대한 인정은 불가한 제스쳐였고, 요르단 강 서안의 정착촌을 보기하지도 않았다. 이후 네타냐후가 등장했고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분리 차별 정책) 체제를 굳혔다.
네타냐후 시대, 2009-2024
정착민 자경단의 호전적 태도로 사람을 죽여도 민간인을 전혀 보호하지 않았고, 동예루살렘을 유대화하기 위한 종족 청소를 하루도 쉬지 않았다. 이후 온건한 연합정부시절 이스라엘은 260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
2022년 재집권한 네타냐후는 신정국가건설을 위한 마지막 단계로 사법부의 독립성을 정치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비록 이스라엘 사법주가 국제법을 위반하는 현실에 대해 방관했고 팔레스타인인들에대한 탄압을 위해 제정된 각종 인종청소 관련법을 지지했다는 비도덕성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세속적 이스라엘인들은 사법부의 정치화를 반대하는 시위에 동참했다.
이스라엘을 이루고 있는 두개의 축은 이스라엘 국가와 유대국가라 부를 수있는 실체 세력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그들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라 부르며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추구한다. 이에 대해 유대 국가는 요르단 서안에 정착한 정착민 국가다. 이스라엘을 인종주의 파시즘에 빠진 신정국가가 되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에는 진정한 좌파가 없다.
2023년 10월 7일 유엔 사무총장안토니우 구테흐스는 이스라엘을 질책하고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간단히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스라엘은 그의 사임을 요구하며 비난과 함께 누구도 건드릴 수없는 성역처럼 유대주의 시온주의를 지키고자했다. 이에 따른 행동으로 가자지구에 제노사이드를 가했다.
이슬람 성지에 대한 모욕 행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대한 파괴 학살 행위, 가자에 있는 그리스정교회 교회 파괴,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해 하마스는 10월 7일 공격을 감행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로부터 폭력을 배운 하마스의 젊은이들이었다. 1천 2백 명을 살해했고, 2백 51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후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격해서 4만 6천명이 죽었다.
1948년의 역사에서부터 모든 것을 바로 잡아나가야한다.
1.팔레스타인은 텅빈 땅이 아니었고, 2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살았다는 유대인들이 시온주의 정착민의 조상이라는 근거도 없다.(시온주의의 날조와 허구성)
2.영국은 1차세계대전 후 피지배 식민 민족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이스라엘과 함께 종족청소를 공모한 범죄자집단이다.
3.정착민 식민 운동은 유럽식 식민 정책으로 원주민들을 제거하는 종족청소의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20년대 중반 영국의 토지법은 종족청소의 근거가 되어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토대로 작용했다.
4.팔레스타인 투쟁을 반식민지 저항으로 전세계인은 인식해야한다.
5.67년부터 미국은 평화를 주도했지만, 미국과 유럽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편들기로 인해 모두 실패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더욱 노골적으로 학살과 폭거를 자행한 계기가 될 뿐이었다. 2차에 걸친 인티파다를 불러올 뿐이었다.
6.두 국가 해법은 완전히 실패했다. 팔레스타인 난민문제와 이스라엘 내의 팔레스타인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두 국가 해법은 있을 수없다. 따라서 한 국가 해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7.탈식민화-반식민를 통해 해방과 화해로 나가야한다. 현실적 해법이 중요하다.
8.팔레스타인인은 저항으로, 이스라엘인은 정체성의 깨달음으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파레스타인인들이 할 수있는 일은 반식민을 주의로 삼아 저항하는 일이 최선의 길이다. 그 길만이 자신의 정체를 만방에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 반면 모든 사건의 원인제공자인 이스라엘은 그동안 800만인구로 성장하여 세계적으로 강력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구성도 두개의 파로 나눠져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내적 분쟁의 씨앗을 벌써 잉태하고 있는 듯하다. 유대국이든 이스라엘국이든 그들 자신도 하나가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
2025년 3월 17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470여명이 사망, 유엔 직원들도 사망했다. 휴전협정이 발효되지 않은 틈을 타 공습으로 77명을 더 살해했다.
이스라엘은 그들 자신이 유럽에서 건너온 문화적 선민이라는 의식에 빠져 중동과 아랍민족을 낙후한 미개지역, 미개인이라고 인식하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들이 모시는 신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선민의식이 2천년을 떠돌게한 원인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보면, 그들 자신의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준엄한 비판도 냉철한 머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그들이 받은 박해를 고스란히 다른 민족에게 돌려줄 권리는 그들에게 없다. 단지 또 다른 학살, 범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죄지은 사람이 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정의이며 인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