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적 서사구조를 그리다
장르 드라마 스릴러
원제 Le Successeur(The Successor)
원작 알렉상드르 포스텔 'L'Ascendant'
감독 자비에르 르그랑
출연 마크-앙드레 그롱당(엘리아스 바네즈 역), 이베스 자크(도미니크 역)
촬영 나탈리 듀랑
편집 요르고스 람프리노스, 줄리 윌라이
음악 세바스찬 악코테
제작국가 프랑스, 캐나다, 벨기에
러닝타임 118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최초)2023. 9.27. (한국)2025.11.12.
엘리아스는 차세대 파리 패션의 선두 주자다. 갑작스런 심장 통증으로 진료를 받은 후 가족력을 의심한다. 이후 연을 끊고 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경찰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엘리아스는 파리의 패션업계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기 위한 중요 시점에 와 있다. 의절한 아버지의 재산과 장례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 누가 대신 가 줄 것을 수소문하나 아들인 자기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억지로 고향인 캐나다 퀘벡으로 간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는 여자를 발견한 엘리아스는 기겁을 하고, 달아나는 여자와 몸싸움 끝에 쓰러진 여자를 다시 지하실로 옮기는 과정에 여자가 계단을 굴러 바닥으로 떨어져 죽게 된다. 알 수 없는 엘리아스의 행동이 이어진다. 여자의 사체를 숲에 유기해 버리고 졸지에 살인자가 된 엘리아스.
아버지와 친구가 된지 12년 되었다는 마을에 사는 도미니크가 장례식에 오게 되고, 장례식 추모영상을 통해 아버지가 실종자 찾기 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는데, 영상 속 사진에서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던 그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란다. 이어지는 도미니크의 추도사, 자신의 딸이 실종된 것에 함께 슬퍼하며 엘리아스가 딸 찾기에 나서 준 것에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는 도미니크.
아버지와 도미니크, 그녀의 딸과의 관계를 파악하게 된 엘리아스는 오열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 뒷정리를 하며 지하실에 있는 와인을 가지러 간 도미니크가 지하실의 비밀문이 열린 것을 보고 들어간다. 그 안에는 자신의 딸이 감금된 방이 있다. 과연 그 방을 쳐다본 도미니크의 눈에는 무엇이 들어왔을까.
모델들의 워킹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런웨이의 양쪽으로 관객들을 앉히고 밖에서 안으로 반원을 그리며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 다시 반원을 그리며 사람들 밖으로 빠져 나오는 구조다. 이걸 하늘에서 잡으면 태극도설의 도식대로 음양의 소용돌이로 보인다. 모델들의 움직임은 활발하게 요동치는 음과 양의 회오리가 된다.
영화는 그림(영상)으로 말하는 장르다. 예술을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의 생각을 현실이라는 도구로 그려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구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들이다. 모든 사물에는 사물들끼리의 연관 고리가 있고, 그 고리가 어떤 고리라고 하는 것을 창작자는 보여주어야 한다. 모든 관념이 그림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첫 장면에서 다 나온 것이다. 나머지 전체 내용은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스토리를 구성한다. 그래서 영화에서 스토리란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데 어우러져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 그것은 다음의 그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친구의 아들이니, 자식과 마찬가지다. 엘리아즈를 위로해주는 도미니크의 팔과 손을 보라. 왼손으로는 엘리아즈의 뒷목을 잡고 끌어당긴다. 그러나 오른손으로는 그를 밀어내고 있다. 움직일 때는 그 모양새가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화면을 세워놓고 보면 영락없이 설명한 바와 같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영화는 그림으로 말한다는 것에 다시 주목해 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은 눈에 대사와 행동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생활의 상식이겠지만, 이게 영화라는 예술이라고 한다면, 영화만이 가지는 독자적인 표현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상대의 머리를 내쪽으로 끌어당기는 것은 이성적 이해에 해당한다. 그리고 오른 팔로 상대를 밀어내는 것 같은 모양새는 가슴으로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친한 친구가 딸을 유괴해서 지하실에 감춰 둔 세월이 12년이라는 사실은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도미니크와 엘리아스의 아버지는 실종된 딸 찾기를 사회가 잊지 않도록 사람들 앞에서 시위하며 사회 운동을 같이 한 사람들이다. 믿지만 의심할 수밖에 없는 본능 적인 느낌, 친구의 자식이지만 마음을 다 해서 껴안을 수 없는 그런 상태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후계자라고 번역된 제목은 반만 의미화된 것이다. 계승자라는 의미가 더해져야 이 영화의 제목은 완성된다. 잡지 바자의 표지 사진에 등장하면서 패션계를 위임받은 최고의 실력자라는 의미를 지닌 후계자와, 아버지의 추악한 이면을 유전적으로 그대로 물려받았다는 계승자의 의미가 하나로 합쳐질 때 이 영화의 내적 외적 구조는 완성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첫 장면으로 다시 돌아간다. 서로 다른 상극의 것이 한 데 어우러져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인식을 스토리가 아니라, 그림들을 통해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영화를 가장 영화답게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사물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