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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고였을 뿐

by 별사탕
그저사고였을 뿐.jpg

장르 드라마, 범죄, 스릴러, 복수물

감독 자파르 파나히

제작자 파르 파나히 필리프 마르탱 데이빗 시온

출연 바히드 모바셰리 마리암 아프사리 에브라힘 아지지 하디스 하크바텐 마지드 파나히 모함마드 알리 엘야스메흐 외

촬영 아민 자파리

편집 아미르 에트미난

개봉일 칸 2025년 5월 20일 한국 2025년 10월 1일

화면비 1.85 : 1

상영 시간 103분 (1시간 43분 12초)

상영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어떤 남자가 임신한 아내와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딸아이를 태우고 차를 몰고 집으로 가고 있다. 어둠 속에서 개를 치어 죽이는 사고를 냈고, 아내는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남편을 위로한다. 그러나 딸은 아빠가 개를 죽인 것이라고 명확한 사실을 말한다.

차를 수리하기 위해 들른 공업사에서 바히드라는 직원이 수리하러 온 남자를 알아본다. 그는 정부 정책에 저항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하고 고문한 정보요원이었던 것. 문제는 알아보았다는 게, 그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통해 알아봤다는 게 아니라, 남자가 하고 있는 의족의 삐걱대는 소리를 통해 알아봤다는 것이다.

고문당한 노동자들은 모두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 할 수 있는 일은 듣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바히드는 확신한다. 어떻게 자신을 고문하고 인간적 모멸을 느끼게 한 그 소리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싶은 것이다.

남자를 납치해 땅을 파고 묻기 시작하는 바히드, 그러나 남자는 자기는 정보요원이 아니라는 절규를 하며 다리도 최근에 사고로 잃은 것이라고 자기를 변호한다.

이제 바히드는 미심쩍다. 자신의 청각에 의한 기억에 자신이 없어진다. 이제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그 여행은 목적지를 찾아가는 통과여행이다.


이야기의 순수성

옛날 옛적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다. 노인들에게는 자식이 없다. 할머니가 빨래하러 내에 갔다가 강물에 떠내려오는 바구니를 발견하고 집으로 가져왔다. 그 속에는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가 들어있었다. 할아버지와 나누어 먹기 위해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할아버지가 집에 돌아오고 할머니는 복숭아를 나워 먹기 위해 칼로 두 동강을 냈다. 놀랍게도 그 속에서 동자가 나왔다.

동자는 무럭무럭 자라, 기다가 걷다가 뛰어다녔다. 어느 날 두 노인의 집에 반쪽이가 들어와 할아버지 할머니를 잡아가버렸다. 이후 복숭아 동자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난다. 그러면서 온갖 동물을 다 만나고 하나하나 극복한 후 친구가 되어 최종적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일본의 모모타로 이야기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로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헤라클레스 이야기가 있고, 우리나라의 바리데기 이야기도 그런 구조를 띤고 있다.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것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감독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그런 서사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낸 바 있다. 이란 감독들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독특한 서사구조는 이야기의 원초적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이야기 자체가 가진 순수성에 닿게 한다. 이야기를 듣는(보는) 관객도 그 자리에 함께 한다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복원되는 상처

고문당한 사람들의 회상이 현재로 소환된다. 괴로운 트라우마만 존재하고, 행위자에 대한 실체는 없다. 안마하며 귀로 들은 '그놈 목소리', 의족의 질감과 반대편 다리에 난 상처의 감촉 그들에게 남은 것은 소리들이다. 기억은 상처로 복원되고 있었던 것. 분노와 공황 상태에 휩싸여 기절하고 발작하는 피해자도 있다.

놀랍게도 이야기의 구조는 사람들의 상처를 복원하고 지난날의 감정을 회복시켜 분노에 떨게 한다. 기억을 소환하는 방식이 이야기의 구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탄생이라는 희망

정보요원인 가해자의 아내가 출산을 하고 전통의례에 따라, 모였던 피해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갹출하여 아이와 가족에게 축복한다. 처음에 벌여놓았던 일은 이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듯하다. 가해자는 끝내 자백하지 않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

사진사 시바가 가해자의 귀에 속삭인다. 고문당할 때, 가해자가 했던 방식 그대로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놀랍게도 가해자는 자신이 에크발이 맞다고 자백을 하고, 상투적인 이유를 대며 용서를 구한다. 무명 상태의 남자가 에크발이라는 이름을 가지는 순간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백해졌다.

그러나 바히드는 에크발을 죽일 수 없다. 그의 가족을 통해 탄생의 순간을 함께 했고, 자백을 받아냈으며, 에크발이 진정한 참회를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히드가 처음 먹었던 강직하고도 분명했던 마음이 수그러들었고 이성적으로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태를 더 큰 눈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사고였을 뿐, 샛강을 건너가는 법

그저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우연성은 내게 잘못이 없다는 뜻일 게다. 나의 잘못을 덮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에크발의 딸이 말한 것처럼, '아빠가 개를 죽인' 사건은 되돌릴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하나의 우연한 사고가 필연으로 내달리게 하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고로 인해 바히드를 만나고 이후 고문 피해자들을 모두 만나는 일이 발생하고, 아들이 출생하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모두 사고로 볼 수는 없다는 은유가 파나히의 이야기에는 깔려있다.

모든 일이 끝냈다고 생각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바히드의 귀에 다시 의족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부정한 정부의 하수인이 되었건, 부당한 침략자가 되었건, 신을 내세운 식민지배자가 되었건 신은 존재하며 그 신은 인간을 항상 바른 곳으로 인도하며 그 뜻에 따르겠다는 종교적 믿음이 아랍인들에게는 있는 것 같다. 현실의 삶은 신이 인간을 위해 마련해 놓은 조각들이다. 인간은 결국 그 조각을 하나씩 맞추며 완성될 그림을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마지막 조각을 맞추었을 때 인간이 예상하지 못한 전혀 다른 그림이 완성되더라도 놀라거나 노여워하지 말 것이다.

인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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