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 형식의 고전적 모범
외형적 조형의 배치와 구도를 통해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따라서 형식적 가치는 미학적가치와 직결된다. 형식을 통해 내용은 가치의 깊이를 가진다. 이런 일련의 연결고리들은 유물론을 기초한 미학을 완성해 냈다. 그것을 순수한 형식주의라고 한다. 역사적 전개야 어떻든, 사고의 단초가 그렇다는 뜻이다.
슈클로프스키의 낯설게하기에서부터 로만 야콥슨의 구조주의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그들은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어떻게 말하는가에 미학적 가치를 두었다. 스티븐 킹이 시도하는 아름다운 외형 역시 영화적 표현에 힘입어 빛난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어떻게 보여주느냐로 넘어간 세계의 전형이다.
Do I contradict myself?
Very well then I contradict myself
(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
지진이 나고 통신이 끊기면서 사람들은 패닉상태에 빠지고, 그야말로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으러 하루 아침에 생활현장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들이 찾아가는 것은 전 남편이거나 전 남자친구와 같이 평생 잊지 못하고 살고 있었던 그 사람들이다. 하늘에서 별이 하나씩 사라진다. 그렇게 밤하늘에 빛나는 은하수의 별들이 하나씩 꺼지면서 우주 또한 사라지기 직전의 상태가 된다.
인간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언제나 한계 테두리 안에 생존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이 종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원초적이고 단순하며, 생을 위한 기초적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인간의 생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사의 상관관계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보상은 없다. 전깃불이 나가듯, 어느날 갑자기 신체의 불이 꺼져버리는 것, 그것이 죽음이다. 생각하기에 따라 슬프기도 한 일, 그것이 죽음이다.
그러니 생을 느끼는 지금의 내 몸은 구차하게 어느 것 하나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단편적 기억과 사건에 매달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너를 나쁘게 만드는 방식의 모든 자기 부정보다 얼키설키 엮여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경험과 전망들이 나를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척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이 읽어준 휘트먼이 인간에게 주는 위로다. 너의 머리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large하고 multitudes 인 것들)이 너의 진짜라고 생각하라는 것.
세상에 이변이 발생하는 것과 동시에 척이라는 사람의 광고가 옥외 광고판 뿐 아니라, 안방의 TV에 까지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척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전기가 나가고 인터넷이 끊기고, 사람들이 사라지고, 병원에 자살자들이 몰려들며 출퇴근 차량이 막혀 사람들은 걸어다녀야하는 상황 속에서 급기야 밤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꺼져버린다. 위대한 39년의 생을 산 척에게 감사하다는 광고는 세상이 어두워질수록 점점 더 많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 사이 진짜 사랑을 찾는 다거나,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행위에 집중한다.
세상이 소멸하게 되는 원인은 환경도 아니고 전쟁도 아니다. 그것은 한사람의 죽음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삶은 위대한 것으로 칭송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한사람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돌아보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다.
현실은 늘 이해불가한 시간이다. 미래는 알 수없는 현실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과거 뿐이다. 과거는 이미 일어난 사실들의 무덤이다. 그걸 파헤쳐내면 지금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단순한 생각의 구조가 역행구성의 3막을 만들어 냈다.
지금 현재에 발생한 사건의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척의 일생에 적용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 것이다. 이것이 밀상을 뒤엎는 파격을 가져왔고, 관객은 이 낯선 것에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는 것이다. 따져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 이런 관습을 뒤집는 방식을 쓰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동시에 의미 또한 깊어진다. 이것은 말하는 방식의 문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