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대기

by 별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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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드라마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출연 이머전 푸츠(리디아) 톰 스터리지(데빈) 소라 버 (클라우디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시간 128분

개봉 2026-01-28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자전소설 '물의 연대기'(2011)를 '스펜서'의 주인공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영화화한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소설가가 되는가 하는 그 과정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영화를 관통하는 한 사람의 삶 이전에 메타 글쓰기 영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있다.


프로이트가 준 상식에 의하면, 억압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기제중 하나다. 억압은 성격을 발달시키고 동시에 정신병증을 유발시킨다. 공과가 분명한 야누스다. 인간의 성장과정은 억압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끝나지 않는 싸움이다. 그래서 인간의 고통 또한 영속한다.

연대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의도하는는 엔딩과는 다르게 그 이면에서는 해피할 수 없는 엔딩을 떠올리게 한다. 생의 비극이다.


'아버지 - 딸 - 아들'로 이어지는 삼대의 구조 안에서, 받고 주는 중간자로서의 딸을 보여준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폭행이 가져온 내면의 억누름, 억압은 글쓰기로 지속되며 결국 승화한다. 이것은 마치 제인 캠피온(원작자 재닛 프레임)의 '내 책상 위의 천사'를 연상시킨다. 천형과도 같은 글쓰기.


물은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상징한다. 이 스토리의 전체 전개과정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과 사의 연계'다. 한 사람의 욕구가 욕망화 되었다가, 그것이 또 한 사람에게는 죽음으로 자기 파괴의 발현되었다가, 그 파괴의 경험은 다시 욕구와 욕망으로 분출된다는 순환구조, 더러운 연대기의 고리다. 그러나 그 더러운 욕구와 욕망이 새로운 생명을 낳는다. 이렇듯, 생과 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 없이 선을 넘나든다. 이 과정에 끼어들어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이 수신자(리디아)를 중심으로 한 억압이다. 이 모든 과정에 물이 작용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자 죽음의 제공자다. 탄생과 죽음, 음양을 동시에 가진 원천에 리디아는 빠져있다.

그것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다. 여성의 성기는 쾌락을 느끼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 거기에서 나오는 물 역시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생명을 받아 내는 우주의 그릇과도 같다.

리디아는 그것을 저주한다. 그 '구멍을 꿰매서'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성폭력으로 인한 공격적 방어는 자기 파괴적 이상심리로 잠재한다. 너를 내 몸속에서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무기력함과 억압된 자기 폭력성의 분출이다.

아버지, 폭력의 근원은 익사 직전에 구출되어 단기 기억상실에 걸림으로써 악의 근원에서 제거된다. 그리고 새로 꾸린 가정에서 리디아는 아들을 출산한다. 물을 무서워하는 아들, 그렇지 않다고 물을 받아들 일 수 있도록 가르치는 리디아. 물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을 키워낸 요람과도 같다는 사실을 리디아는 체감적으로 알고 있다. 그 힘은 아들을 양육하는 건강한 힘이 된다.


이 영화가 전개상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는 부적절한 소재, 욕망을 노출하는 카메라 앵글, 이런 것이 아니라 시간의 배열에 있다. 일반적으로 인서트를 통해 장면을 집어 넣는 경우는 회상을 위해 시간을 뒤로 돌리는 방식에 사용한다. 그러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인서트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여 준 것. 독특한 표현 방식이다. 그래서 관객은 혼란스럽다. 여러 세대를 한 공간에 섞어서 시공을 통합한 스토리를 전개한 '사운드 오브 폴링'이 그래서 혼란스러웠던 경험을 관객은 가지고 있다.

초창기 영화이론 정착기에, 조형주의 이론을 주장했던 일련의 비평가들이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를 끌어왔던 것처럼 새로운 표현은 간혹 당혹감을 주기도 한다. 관객에게 가깝게 다가가느냐, 그로 인해 멀어지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의 선호에 달려 있겠지만, 그 선호가 필연적 선택이 되었을 때 관객에게도 호소력을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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