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향해 가는 길
대수롭지 않게 이 영화를 보면 그저 그런 영화라고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고, 꼼꼼히 챙겨본다면 몇 가지 질문과 이야기 ‘거리’들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 감정과 종교적 감정의 색깔
할머니를 잃은 중학생 예선의 외로움과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할 고통과 쓸쓸함에 대하여, 수녀 둘이 가지는 감정은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종교적 포용의 마음이다. 그래서 수녀들은 ‘법으로 안 되는 것을 마음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힘을 가진다. 할머니를 잃고 홀로 살아가야 할 세속적 시각은 그저 피부양자였던 예선이 부양자를 잃고 위탁가정이나 기관으로 넘어가야 할 사정을 가진 복지 사각지대의 대상자일 뿐이겠지만, 종교적 시각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내 탓’으로만 여겨지는 하나님의 긍휼한 여식으로 보듬어야 할 존재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화면은 밤과 낮의 극명한 대조, 어둠과 빛의 선명한 대조다. 예선과 그 친구들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들은 제주의 밤거리, 골목 안의 풍경들이 먼바다를 배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런 일련의 밤 장면들이 일소되면서 환한 투 샷으로 잡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스텔라 수녀와 새별의 엄마가 나란히 앉아있는 장면이 그것이다. 애 엄마가 울고, 스텔라 수녀가 끌어안아 주는 이 장면은 밤이 낮으로 바뀌면서, 어둠이 빛으로 바뀌는 극적인 효과를 드러낸다. 잘못이 용서되고, 생명의 소중함이 하얗게 피어나는 순백의 꽃과 같은, 순수한 생명을 상징하는 빛이 그려놓는 그림 같은 장면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세속과 종교가 부딪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세속이 종교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쪽이다. 그것도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는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치밀한 의도를 가졌거나 감독이 지닌 ‘상시의 정서’가 녹아들어 갔거나 하는,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작가적 의도가 십분 흘러 들어간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시선, 카메라아이
관찰자와 사건 사이에는 변하지 않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사건의 중심에 카메라를 얹은 삼각대를 꽂아 놓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철저하게 감독이 의도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 거리는 사건에 다가갈 수 없는 거리와도 같다. 사건은 등장인물들이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건이 서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서사는 관객(혹은 인간)이 쉽게 접할 수 있는 객관적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놀랍게도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영역에 대한 표현 방식이다.
인간은 세속에 복무한다. 종교는 초월적 세계를 바라보며 세속을 향한다. 그래서 초월적 세계는 세속과 같은 곳에 있지 않다. 이런 연속적이지 않은 분절의 모순된 세계가 상정된 곳에서 존재하는 인간은 고뇌와 번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극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카메라의 눈은 그러한 비극적 현실을 그저 담담하게 바라보는 자세로 일관한다.
샤인, 언덕을 오르며
할머니의 죽음이 가져온, 어둠 속에서 다시 얻은 새 희망인 새별을 잃은 예선은 언덕을 오른다. 그 너머는 환하게 빛나는 빛의 세계다. 밤의 어둠에서 환하게 빛나는 기쁨과도 같은 빛의 세계가 있는 중간 영역을 넘어, 그 정상에서 바라보게 될 환영과도 같은 빛의 정점에 오른 예선의 눈에 무엇이 나타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은 알 수 있다. 카메라의 눈이 지금까지 줄곧 예선을 따라와 인간이 할 수 없는, 인간이 이를 수 없는 어떤 경지에 예선이 도달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팔레스타인 학살을 보여주었던 ‘나크바’의 현실을 그린 영화, ‘파르하’의 마지막 장면을 놀랍도록 빼닮았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이라면, 예선이 마주한 장면은 경이로운 영적 체험으로 연결될 것이다.
일상의 세밀한 감정을 흘려보내지 않고, 끝까지 붙들어 앉혀서 그 어디론가 관객을 인도하고자 하는 감독의 능력에 놀람을 금치 못하는 지점, 그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