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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이세무사 Oct 20. 2023

잘한 짓일까? 1
(해외용역공급)

술술이세무사

개업초창기 때부터 개인사업장 3개, 법인사업장 1개를 맡겨주신 대표님이 계시다.


업체 수도 많고 건실하여 우리 사무실 재정에 보탬이 되는 우량거래처이고

어려울 때부터 함께 해주신 것이 감사해 보은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그런 분이다.


그분은 최근에 해외업체와 총판계약을 통한 사업을 계획 중 이셨는데,

해외업체와의 계약이다 보니

'외국법인 및 외국인투자 관련 정리, 법인의 지분구조, 법인 신규설립 유불리, 예상매출 보고서 작성' 등

계획초기부터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아 그때마다 내게 연락을 주셨다.


외국법인 투자관련된 일은 경험이 없어 부족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세무'사'아닌가? 실무서적을 구입해 공부하고 여기저기 물어가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손이 부족하면 발을 더해 사업에 차질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도움을 드렸다.


하지만

누르기만 하면 나오는 자판기처럼 모든 요청을 흔쾌히 승낙하다 보니 그런 과정에서 내가 많이 편해졌 것일까?

업체와 계약을 위해 신규법인 설립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내게 신규법인 사업자등록과 더불어 은행계좌 개설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사업자등록증 신청의 경우 세무대리인의 업무라 늘 하던 일이지만

계좌개설은 도무지 세무사의 일이라고 보기 어려운 심부름 성격의 일이었다.


하지만 사업 때문에 신경 쓸 일도 많당신 직원들보다는 내가 더 편해 그러려니 생각하고 위임장 및 인감증명서 등 서류일체를 구비하여 은행에 방문, 법인통장 2개(원화통장, 외화통장)개설해 차질 없이 전달했다.






따르릉


부가세 신고기간 즈음하여 걸려온 대표님의 전화



"안녕하세요 대표님"


"야 이 새끼야! 무슨 세무사야?! 이 새끼! ~이하 생략 ~"




사무실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래퍼 저리 가라 쉼 없이 욕설과 폭언이 쏟아졌다.


'대체 무슨 상황이지?'


갑작스러운 욕설에 기분 나쁠 틈도 없이 벙쪄있을 무렵

끝날 생각 없이 이어지는 폭언에 탕비실로 조용히 대피하는 직원들을 보니 정신이 바짝 들었다.


'술술아 네가 당황하면 직원들은 누가 지키니, 정신 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해.'


마음을 차분히 하고 상황파악을 시작했다.

1. 전화 상대방은 세무사가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 생각하며 극도로 분노에 휩싸여있었다.

2. 대답할 틈 없이 계속되는 폭언으로 대화는 불가능했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상대방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고 화가 풀어지기를 기다리며,

폭언 속에 가려진 화의 원인을 catch 해 정리해 보았다.


사건의 발단

1. 신규법인으로 용역 관련 외화매출 발생 (해당 법인의 '대표이사'는 '대표의 아들')

2. 대표 → 세무사에게 외화입금 사실 전달

3. 세무사 → '대표이사'에게 외국환매입증명서 요청 (은행방문필요)

4. 세무사 → 대표에게 해외업체와의 용역공급계약서 요청


사건의 발생

1. 외국환매입증명서는 회사관계자가 은행에 방문하여 발급받아야 하는 것으로 은행업무는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세무사 된 입장에서 '대표이사'에게 외국환매입증명서를 요청하였다.

2, '대표이사'는 은행에 방문해 관련 서류를 요청하였으나 어떠한 이유인지 법인계좌에 외화입금사실이 없어 서류를 발급받지 못한 채 헛걸음으로 돌아와야 했다.

3. 대표는 아들의 헛고생, 외화가 입금이 되지 않은 사실, 이로 인해 발생할 부가세 및  법인세 문제까지 걱정하며 이 모든 책임을 세무사의 탓으로 생각하고 있었.



"내용 잘 이해했습니다. 은행 통해서 내용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똑바로 해! 이 새끼야!"



뚜뚜뚜



"전화 다 끝났어요, 나오세요^^"


애써 웃음을 지으며 탕비실로 피신한 직원들을 불렀다.


살면서 '새끼'란 말을 가장 많이 들은 하루..

너덜너덜해진 멘탈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챙길 손톱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이 상황을 당장 해결하지 못하면 제정신으로 집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

은행업무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감정은 접어두고 곧장 일처리에 들어갔다.



은행방문

먼저 법인계좌를 개설했던 은행을 방문해 담당자에게 외화입금 관련 상황을 문의하였다.

답변을 들어보니 법인으로 외화가 입금된 것은 맞으나 외화금액이 크다 보니 어떤 사유로 인한 입금인지 내용과 관련 서류를 업체에 요청하였는데 이와 관련해서 아무런 자료도 제출되지 않아 은행 쪽에서 외화를 보관 중으로 요청자료 제출 시 이상유무 판단 후 바로 입금될 것이라는 전달을 받았다.



매출신고

대표는 '외국환매입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아 부가세신고나 법인세신고가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여 큰 문제를 상상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용역공급계약서'로 이를 대신하면 될 것이다. (당초에 둘 다 요청하기도 했었고)




부가가치세법 시행령 제101조 제1항 제10호

가. 외국환은행이 발급하는 '외화입금증명서'

다만, 부득이 해당서류 발급이 어려운 경우 국세청장이 정하는 서류로 대신할 수 있다.

영세율적용사업자가 제출할 영세율적용 첨부서류 지정 고시

제2조 제3항 비거주자 또는 외국법인에게 공급되는 용역 - '용역공급계약서' 또는 대금청구서




외화미입금 원인도 확인하였고

부가세, 법인세 신고도 외화입금여부와 관련 없이 용역공급계약서로 진행이 가능하다.


해결되지 않은 부분은 아들의 헛고생인데

업체가 은행에서 요청한 서류를 제때 제출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고 나에게는 외화가 입금되었다고 이야기하여 '대표이사'에게 은행방문을 요청했던 것이니 세무사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 역시 법인계좌개설을 위해 2시간 가까이 은행에서 대기하며 이를 처리했는데 자기 아들이 은행에서 좀 기다렸다고 그 난리를 치는 것이라면 '누군 귀한 집 자식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대표님께 전화를 걸었다.



"확인해 보니 이렇고 저렇고 ~이하 생략~ 다 해결이 가능하겠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30초도 안돼 끝난 전화

이렇게 누구의 감정도 상하지 않고 금방 해결할 수 있일이었다.


통화를 마치고 나니

깊이 묻어두었던 분노, 슬픔, 부끄러움, 허무함 갖가지 감정이 깊이 끓어올라 눈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직원들을 퇴근시키고 혼자 남은 사무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알던 그분이 맞을까? 점잖은 분이셨는데..

새로운 사업에 너무 예민해지셨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그분의 민낯을 본 것일까?

그동안 함께한 시간이 무색하게 감정에만 휩싸여 잘못된 상황에 대한 탓을 전부 내게 돌리는 모습을 보고 나니 '그동안 나에 대한 믿음이 1도 없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40분 가까이 이루어진 언어폭력까지..


더 이상 같이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하는 법.


오늘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나 역시 감정에 빠져버린 것인지 지혜로운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계약해지'를 통보하는 메일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은 뒤 '보내기'버튼을 클릭했다.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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