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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이세무사 Oct 21. 2023

잘한 짓일까? 2

술술이세무사

1편


어제의 여파로 산산이 조각난 멘탈은 하룻밤만에 회복될 수 없었다.

아니, 회복은 커녕 상처가 더 아파올 뿐이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는 분이었고,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분께 이런 일을 당하고 나니 화도 나고, 고 오만가지 감정이 솟아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출근해 평온하게 일을 한다는 것은 강철심장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일탈이 필요한 오늘, 출근은 보류하고 멘탈 회복을 위해 느닷없는 휴가를 즐기기로 했다.


마땅히 할 것은 없으

일단 조조로 유쾌한 영화를 보고

디저트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에 달콤한 케이크를 먹었다.


과연 영화는 재미있었고, 케이크는 달달했을까?


휴가라는 포장으로 잠시 잊은 척했지만 잊으려 하면 할수록 더 짙어지는

어제 들은 '모욕적' 폭언과 '철없이' 보내버린 계약해지 메일이 결국 돌아가야 하는 현실이었다.






따르릉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누구일까?' 전화기를 들여다보니 대표님께 걸려온 전화다.


그 이름 석자를 니 더 강렬하게 어제의 기억이 떠오른다.

밀려오는 두려움과 함께 두근거리는 심장.

별 일 아닌 일에 그 난리를 치셨으니

'사과말씀이라도 하시겠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이 새끼야! 네가 뭔데 계약을 해지해! 어디서 그런 말을 꺼내 건방진 새끼야!"



아무리 가혹한 현실이더라도 이틀연속이나 폭언을 듣는 것은 꿈에서 조차 상상하지 못한 일.

어제는 내가 큰 잘못이라도 했는 줄 알고 아무 말 없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상황을 다 알게 된 지금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한테 그렇게 심하게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습니다! ~ 이하 생략 ~"



마이크는 나의 turn이었다.

-욕설과 폭언에 느꼈모욕감

-그럼에도 조금의 군말 없이 문제를 완벽하게 처리한 것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상황을 이렇게 크게 만든 것에 대한 당신의 책임

-그동안 도움을 드렸던 일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쏟아냈다.



"이렇게 신뢰가 깨어진 상황에서 제가 어떻게 전처럼 웃으며 얼굴을 보고 최선을 다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는 웃고 뒤로는 흉보고 그렇게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와 함께 일하는 것은 되려 사업에 악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앞으로 사업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숙고 끝에 계약해지를 말씀드린 것입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에 입을 다물고 있던 대표님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내가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그동안은 잘 몰랐지만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분 있었는지, 보통사람들이 보이는 반성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윽박을 지르며 사과의 뜻을 보였다.



"그래도 같이 일은 계속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충격!

대표님은 나와의 계약을 유지하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아니! 함께할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어째서 그렇게 상처 주는 언행을 하셨습니까?

대체 왜 그러셨어요?!



"하루만 생각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죠."






앞서 말했듯 대표님은 개업초기부터 '젊은 세무사'를 도와주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해주신 나에게는 보석 같은 분이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긴 했지만

살아감에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주셨고

나이도 한참 많은 인생 선배님이며

남다른 방식이긴 하나 사과의 뜻도 전해주셨다.

끝까지 함께 일하고 싶다는 뜻도 비춰주셨고



원점으로 돌아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인 문제

개인사업장 3개와 법인사업장 1개 + 신규법인 1개까지 하면 총 5개 업체로 기장료+조정료가 연간 2천만 원 이상이 예상되는 계란 노른자위 같은 거래처였다.

이렇게 큰 거래처가 한 번에 빠지면 직원 급여인상 등 향후 회사 운영에 문제가 생길 것은 안 봐도 뻔한 일.

내 감정만 챙겨서 될 일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

주변 세무사와 지인들에게도 물어보니


'술술아 그런 일 어'

'그런 거 하나하나 어떻게 다 따지면서 일을 하냐'

'난 어제도 쌍욕 먹었다.'


눈 딱 감고 다시 일을 하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계약해지에 동의한 소수의 분도 기장료와 조정료 금액을 들으면 이내 말을 바꾸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


따지고 보면 서로 이해관계로 만났을 뿐

우정을 나눈 벗도 아니고 비즈니스관계에서 믿음과 신뢰라는 것도 어찌 보면 입바른 소리다.

나는 돈을 받고 일을 하면 그만이고

대표님은 돈을 주고 문제를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뜨거운 가슴보다 차가운 머리로 감정은 접어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고름은 살이 될 수 없다.


지난 간 일은 지난 간 일이지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법이다.

진정으로 담대하게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속좁고 너그럽지 못한 일개 범부일 뿐.

바로 어제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일을 내일 모른 체 연기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연기에 불과한 것, 덮어둔 마음의 상처는 두고두고 나를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제법 시간이 지나면 웃으면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서로 간의 계약관계가 정리된 후의 일이다.

지금처럼 갑, 을관계가 지속된다면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표님 역시 제대로 된 세무서비스를 받기 위해 내게 돈을 지불하는 것이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적선하는  아니다.

그런데 내가 만약 미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면 전과 같은 진정성을 갖고 책임을 다해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역시 장담할 수 없다.


그랬다.

돈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


나를 죽이는 일이었다.






하루동안의 깊은 고민 속에 흰머리가 10개는 더 늘었을까?

감정에 취해 처음 계약해지 메일을 보냈을 때와는 다르게 현실에서 오는 어려움과 주변의 만류로 인해 굉장한 흔들림이 있었다.

이성과 감성, 돈과 자존감 사이에서 오는 치열한 다툼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는

나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다음날 대표님께 다시 한번 '계약해지'를 통보하는 메일을 보냈고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전화통화 없이 '알겠다.'는 답신받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어온 서로 계약은 종료되었다.







돈과 명예, 우정, 사랑, 자존감 등이 저울질되는 선택의 순간.

돈과 다른 무언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일까?


이렇게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대표님과 있었던 일이 가끔씩 생각다.


아직도 내가 잘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다만

소원하는 것은 한 가지

조금 더 행복한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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