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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선아 SSunalife Jan 15. 2022

성장을 위한 관계의 온도와 거리

관계가 성장하려면

최근 몇 년 사이 인터넷이나 책자 그리고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관계에는 온도와 거리가 있다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되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수많은 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에 그 관계로 인해 때론 아프고 때론 위로를 받는다. 어느 정도의 온도와 거리가 적절한 관계인지는 정답이 없다.


직장에서 동려들과 건강한 거리(영어로 healthy distance)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내 일만 하고 너무 사무적이면 직장이란 곳이 정기적으로 나오는 페이 체크(pay checque 급여를 말한다. 캐나다에서는 많은 경우한 달에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즉 이 주마다 급여가 지급된다)를 받기 위한 곳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너무 사적으로 가까워도 주변의 다른 사람이 되려 소외감을 가질 수 있으므로 친밀하되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오랜 시간 경험하고 여러 실수들을 통해서 나는 동료들과 건강할 거리를 가질 수 있는 태도를 익혀왔다.


그러나 가족 사이에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가족은 그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좋은 것인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너무 소중하니까. 내게 거리감은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더 컸다.


아이들이 성장하여 나와 떨어져 독립된 생활을 하게 되니 물리적인 거리감은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리감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아이들을 보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의 온도는 옆에 끼고 살 때보다도 더 뜨거워졌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늘 궁금하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 정체 모를 걱정과 근심만 늘어갔다. 늘 걱정하는 부모 마음을 아이들은 왜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냐고 귀찮아할 때도 있다. 그러면 내가 혼자 만들어 놓은 내 자식들과의 거리가 확 멀어지고 공연히 서운하고 야속하고 눈물까지 날 때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나 혼자 그 거리감을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혼자 울고 짜고 그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적정의 온도를 유지하고 적절한 거리를 두면서 서로 성장해가고 있다. 



딸아이를 방문하기 며칠 전부터는 그 아이 집을 청소해주어야지. 요리도 해주어야지 등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방문해서는 주어진 시간을 딸아이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요리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평소 내 집에서도 자주 하지 않던 일들을 했다. 딸아이 집만 가면 가사 도우미가 되었다. 딸아이가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나는 그 아이 부엌을 점령하고, 냉장고 안을 내 맘대로 청소하고, 옷가지를 정리했다. 그렇게 노동일을 며칠하고 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파김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 딸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과 내가 좋은 어머니라는 신념에 확신을 더했다.


딸아이의 직업 특성상 근무지가 2년마다 바뀌니 내 옆에 가까이 있을 때 잘해줘야지 하고 나는 내가 혼자서 설정해놓은 좋은 엄마 역할에 충실했다. 딸아이가 내가 방문해 있는 동안만이라도 요리를 안 하고 편하게 엄마가 해준 밥을 먹게 해주고 싶었으며 일로 지친 딸아이가 청소라도 신경 안 쓰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엄마의 노고를 고마워한다면서도 내게 자신의 경계/영역(boundary)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핀잔을 주었다.


그때 나는 직장에서 남에게만 사용했던 바운더리(boundary)라는 단어를 내 가정 안에서 처음으로 듣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는 것은 남을 얘기할 때만 사용하는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자식은 남이 아닌데...' 하는 서운함과 알 수 없는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내 어머니가 생전에 내게 서운하실 때 하셨던 그 말씀("도 자식 낳아보면 엄마 마음 헤아리게 될 것이다")이 가슴에서 폭풍으로 몰아쳤다. 



그리고 깨달았다. 관계에서 거리는 혼자 설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와 타인이 함께 관련한다는 것을. 그 타인은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친구 일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단지 타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정 거리감이 다를 뿐이다.


아이들의 영역을 내 멋대로 침범하지 않고 적정 온도와 적절한 거리감의 균형을 이루며 좋은 관계로 성장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를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첫째, 내 자식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공감대(empathy)를 만드려고 노력한다. 영어에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라는 문장이 있다. 직역하면 너를 남의 신발 안에 넣어봐라라는 뜻인데 의역하면 남의 입장을 생각해봐라는 뜻이다.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고 자식들의 많은 것을 알고 싶고, 왜 그런 결정을 내렸냐고 꾸짖고 싶을 때도 많지만 '그래 네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 자식을 존중하게 되고 또 자식에 대해 믿음도 신뢰도 자연스럽게 커져간다.


둘째, 관계는 성장해야 한다. 관계는 혼자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좋은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쉽지만 어그러진 관계를 되돌리는 것은 말과 같이 쉽지 않다. 좋은 관계일 때 조심하고 배려하고 함께 성장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부모가 아무리 좋은 의도와 큰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한다고 해도 모든 자녀들이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 이해하거나 그 사랑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라. 모든 관계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다 좋아지고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서로 간의 공간을 존중해주고 필요할 때는 섬세하게 또 어떨 때는 좀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도 하면서 상대의 상태에 따라서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저온으로 뭉근하게 다가가야 할 때가 있다. 너무 멀어지면 무심해 지기 쉽고 너무 가까우면 뜨거워 데일 수도 있는 것이 부모와 자식 관계인 것 같다.

 



지난여름, 25살 먹은 아들이 근무지가 바뀌어 오타와(Ottwa 캐나다 수도임)로 이사를 했다. 아들은 그곳에 생애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했다. 어린 나이에 집을 사고 여러 결정들을 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대견한 마음도 컸지만 반대로 부족한 점들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들이 생각하고 결정한 사항들이 미숙해 보이자 남편은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아들과 통화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도 하고 템포가 빨라지기도 했다. 아무 소리 없이 듣기만 하고 전화를 끊은 아들은 내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아빠에게 결정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결정했어요라고 알려드리고 아빠의 응원을 바란 거"라고...


아뿔싸! 


아들 생일을 맞아 새로 산 아들 집도 볼 겸 휴가를 내어 오타와를 방문했다. 집안을 둘러보니 나 같으면 그 돈 주고 이 집을 안 샀겠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꾸욱 참았다. 대신 "장하다" "다음번에는 이번에 얻은 경험으로 더 좋은 선택을 하길 바란다"라고만 했다. 딸아이의 부엌을 점령하듯 아들의 집안을 점령하지 않도록 나의 사랑의 온도를 적정 온도로 낮췄다. 아들의 냉장고를 정리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꾸욱 참았다. 이것저것 사주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아들은 천천히 본인의 공간을 채워갈 생각인 듯했다. 아들과 가구를 보러 몇 군데를 함께 다녔다. 옛날 같았으면 내가 쓸 것도 아니면서 내가 나서서 이거 사라 저거 사라 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냥 아들만 따라다녔다. 그리고 아들이 내 생각은 어떠냐 물으면 그때서야 내 의견을 말하고 혹시 아들과 생각이 다르면 "네가 가지고 살거니 네가 좋아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기하게도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면 줄수록 아들은 내 의견을 물어보는 횟수가 잦아졌다. 엄마의 용광로 같은 뜨거운 사랑으로 혹여나 아들과 나의 관계가 화상을 입지 않도록 조심하고 자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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