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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Feb 05. 2024

존 컨스터블의 나무

: 존재 그대로를 향한 애정


터너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존 컨스터블의 그림은 오랫동안 나에게 그냥 스쳐 지나가는 따분한 풍경화에 불과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그의 작은 유화 스케치는 거대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허리를 다치고 시작한 매일의 느린 산책에서 평온을 맛보던 시기였다. 화가가 한 느릅나무 앞에서 느낀 묵직한 존재감과 켜켜이 쌓인 세월, 생명의 에너지가 이 그림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튼튼한 토르소(몸통)가 부러울 정도였다. 이후 눈에 띄는 나무를 만나면 세밀하게 바라보고 그 존재를 온몸으로 느껴보곤 했다. 돌이켜보니 이 그림은 시리즈를 시작하게 한 영감의 단초였던 셈이다.      


존 컨스터블, <느릅나무 몸통 연구>, 1821년경, 종이에 유채, 30.6 x 24.8cm,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런던


초원 중앙에 듬직한 나무의 몸통이 자리한다. 위쪽은 보이지 않지만 사방으로 뻗은 가지는 나무의 풍성한 자태를 짐작케 한다. 몸통은 주변 나무들에 비해 사실적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었는데, 특히 두꺼운 껍질과 이끼의 축축함이 느껴질 정도다. 컨스터블의 말처럼 이런 모습은 산책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그만큼 있는 그대로의 나무의 피부와 질감, 강한 존재감까지 생생하게 살려낸 화가는 찾기 어렵다.  

 



존 컨스터블(Jonh Constable, 1776~1837)은 1776년 영국 남동부 서퍽주 이스트 버고트(East Bergholt)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투어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곡창지대에서 보낸 행복한 어린 시절은 그의 삶과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버지의 사업을 도우며 취미로 그림을 배우던 컨스터블은 지인의 컬렉션에서 대가들의 풍경화를 접하며 뒤늦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전의 모티프를 삽입한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1682)의 장엄하고 이상적인 풍경화, 네덜란드의 풍경을 사실적이면서 서정적으로 묘사한 야콥 반 루이스달(1625~1682)과 영국의 풍경을 즐겨 그렸던 토마스 게인즈버러(1727~1788)의 작품이 인생의 항로를 바꾼 것이다.   


1799년 스물셋의 컨스터블은 런던에 있는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배웠다. 당시 교육은 역사화(신화와 성서,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를 그리기 위한 고전 조각과 옛 걸작의 모사, 인체 데생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풍경화는 그림의 위계가 낮은 데다 대중적으로도 수요가 많지 않았다. 소수의 화가들이 풍경화의 교본으로 여겨졌던 클로드 로랭의 고전적인 풍경화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1802년 컨스터블은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자신의 열정을 따라 영국의 시골과 해안을 여행하며 자연을 직접 연구하기 시작한다.  



존 컨스터블, <좁은 길, 이스트 버고트>, 1811년, 종이에 유채, 22.1 x 19.5cm/  1817년, 캔버스에 유채, 69.2 x 92.5cm

컨스터블은 야외에서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주로 유화로 스케치를 했다. 시골의 초원과 강, 숲과 나무, 바다 등 자연의 경험을 즉각적인 채색과 창조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는 특히 유화의 특성과 다양한 붓질을 활용해 자연의 형태와 색채, 빛과 분위기를 실감 나게 표현했다. 두껍게 칠하는 임파스토, 반쯤 마른 붓으로 빠르게 칠해 거친 질감을 표현하거나 하얀 점으로 빛의 효과를 내고, 투명한 광택제(글레이즈) 혹은 송진을 활용하기도 했다. 고향 이스트 버고트의 좁은 길을 그린 스케치(1811)를 보면 묘사는 성기지만 그곳의 공기와 바람이 느껴진다. 자연을 보다 진실하고 정직하게 표현하고자 시도한 수많은 스케치는 향후 여러 완성작의 밑바탕이 된다.  


“자연을 스케치할 때 나는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잊으려고 애쓴다.”  - 존 컨스터블



존 컨스터블, <큰 오크 나무>, 1801년경, 54 x 44.4cm, 종이에 연필/ <물푸레 나무>, 1817년, 32.8 x 23.8cm


컨스터블은 나무만을 주목해 그린 드로잉 작업도 지속했다. 화가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레슬리(C. R. Leslie)는 ‘콘스터블이 마치 어여쁜 아이를 팔에 감싼 것처럼 기쁜 황홀감에 젖어 나무를 보고 경탄했다.’고 회상한다. 유화 스케치와 다르게 연필 드로잉은 나무의 세부까지 매우 세밀하게 묘사되었다. <큰 오크 나무>에서 단단한 몸통과 사방으로 굴곡지게 뻗어나간 나뭇가지는 강인한 생명력을 발산한다. 반면 <물푸레나무>는 기울어진 가는 몸통에 늘어진 가지와 흩날리는 입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컨스터블의 드로잉을 보고 '이것은 드로잉이 아니라 영감이다'라며 감탄하기도 했다.


컨스터블은 1809년경부터 여름은 그리운 고향 서퍽에서 풍경 스케치를 하고, 겨울은 런던에서 보내며 완성작을 그렸다. 이때 그는 어린 시절 친구 마리아(Maria Bicknell)와 재회하며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지역 교구 목사인 그녀의 할아버지는 장래가 불투명한 화가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컨스터블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그가 유산을 받은 1816년이 되어서야 둘은 결혼할 수 있었다. 신혼을 보낸 런던에서 아이가 하나둘 태어나며 부부는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존 컨스터블, <햄스테드 히스>, 1819-20년, 캔버스에 유채, 38.4 x 67cm, 테이트, 런던


그러나 행복도 잠시, 몇 년 후(1819) 아내가 폐결핵 증상을 보이자 컨스터블은 매년 여름을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Hampstead)에서 보낸다. 드넓은 시골에서 자란 그에게 도시의 공원은 작업에 영감을 주지 못했다. 위의 그림처럼 햄스테드는 드넓은 초원과 우거진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교외로, 런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도 자리한다. 컨스터블은 이곳에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더 세심한 자연 연구에 보다 몰두했다.


존 컨스터블, <전나무>, 1820년, 22.3 x 16cm, 종이에 연필,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런던


<전나무>는 아래에서 본 시점으로 인해 나무의 높이와 위엄이 강조되었다. 햇살을 가득 품은 풍성한 잎은 짙은 그늘과 대비를 이룬다. 오른쪽 상단에는 아주 작게 ‘결혼식날, 햄스테드 1820년 10월 2일’이라 쓰여있다. 높이 뻗어나간 전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에 어우러진 나무들을 그리면서 그는 몇 년 전의 결혼을 기념한 것일까. 마치 작은 숲을 이룬 가족을 비유하는 듯하다.    


존 컨스터블, <햄프스테드의 나무: 교회로 가는 길>, 1821년, 캔버스에 유채, 91.4 x72.4cm,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런던


화가는 교회로 가는 길에 본 자연스럽고 우아한 나무들의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흰구름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키순서대로 열 지어 선 물푸레나무의 초록빛이 돋보인다. 왼쪽 가장자리 나무 사이로 교회 첨탑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우리에겐 진부할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당시 사람들에게 과격하고 원초적인 풍경화로 여겨졌다. 우선 당시 유행하던 이상화된 풍경화에 비해 컨스터블이 그린 소박한 영국의 시골 풍경은 너무 평범해 보였다. 그 안에는 고전 건축이나 폐허, 신화나 성경의 인물도 없고 이처럼 덩그러니 자연만 있거나 농부와 일꾼들이 등장할 뿐이다. 게다가 세밀하고 매끈하게 묘사된 고전 풍경화에 비해 컨스터블의 채색은 거칠고 미완성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생생한 초록빛 나무와 초원도 그들에겐 생경했다. 당시 풍경화가들은 작업실에서 전통에 따라 바니시가 바래 갈색톤으로 변한 17세기 대가들의 풍경화를 따라 그렸다. 이런 면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바라보고 재현한 컨스터블의 풍경화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이다.

 

 

존 컨스터블, <나무가 있는 구름, 햄스테드>, 1821년 9월 11일, 종이에 유채, 24.1 x 29.9cm/ <해 질 녘 구름>, 1822년, 15.1 x 24.1cm


망막의 감각을 기록하려는 열정은 컨스터블의 독자적인 구름 연구에서 정점을 향한다. 1821-2년에 그는 햄스테드 언덕에 올라 많은 시간을 보내며 백여 점이 넘는 구름 스케치를 그렸다. 시간과 날씨, 계절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름의 형상과 움직임을 파악하고 빛과 색채 표현도 점차 발전시켰다. 일시적인 자연 현상에 주목했던 컨스터블과 동시대 화가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의 작품은 이후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색채를 포착하고자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과학자의 눈을 가진 화가 컨스터블은 개인적, 사회적 맥락에서도 바라봐야 한다. 컨스터블은 자신을 화가로 만든 것이 아름다운 자연을 맘껏 누린 ‘조심성 없는 어린 시절’이라 말했다. 또한 거대한 땅을 소유한 제분업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농사와 제분에 중요한 날씨와 바람에 더 민감했을 것이다. 합리주의의 발달로 자연 현상에 대한 연구와 출판이 활발해진 시기이기도 했다. 컨스터블은 기상학에 대한 연구서뿐만 아니라 지역의 동식물과 기후, 풍습 등을 연구한 고전, 길버트 화이트의 『셀본의 자연사와 유물들』(1789)을 즐겨 읽었다. 무엇보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고향을 사랑했다.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고, 단 한 시간도 같은 시간이 없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 한 나무의 두 잎사귀도 같아 본 적이 없다. 진정한 미술이란 자연과 같이 서로 달라야 하는 것이다”  - 존 컨스터블



존 컨스터블, <건초 마차>, 1821년, 캔버스에 유채, 130.2 x 185.4cm, 내셔널 갤러리, 런던


여러 연구를 거쳐 영국의 자부심이자 아이콘인 <건초 마차>가 탄생했다. 이곳은 컨스터블의 고향 서퍽주에 있는 아버지의 제분소, 플랫포드 밀(Flatford Mill)의 풍경이다. 왼쪽에 농부가 거주하는 집과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물레방아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 얕은 개울을 건너는 건초 마차는 저 멀리 농부들의 작업이 한창인 초원으로 향한다. 예전에는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게 고리타분해 보였던 이 그림이 이젠 오후의 햇살과 바람, 흙과 물, 풀의 내음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을 감상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2m에 달하는 크기다. 보통 실내를 장식했던 풍경화는 한 손으로 들고 다닐 정도의 크기로 제작되었다. 가족이 늘어나고 경제적인 책임감을 느낀 컨스터블은 역사화처럼 주목을 끌기 위해 1819년부터 큰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일련의 ‘6피트(182.88cm) 그림’은 여러 스케치를 바탕으로 몇 번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컨스터블은 최종작을 위해 동일한 크기의 오일 스케치를 제작하며 모티프를 조정하고 색과 명암의 균형을 맞추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모든 그림과 사진이 그렇듯이 이 풍경 또한 화가의 관점에 따라 프레임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계속된 전쟁으로 경제적인 타격을 입으며 농촌이 급격히 황폐해졌고, 농부들은 도시의 공장 노동자나 극빈층으로 전락하는 불안한 시기였다. 40대 중반의 화가는 아버지 영토에서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풍경을 그렸다. 이는 당시 그림의 관객인 도시의 중산층이 보고 싶어 했던 풍요롭고 평화로운 풍경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영국인들의 DNA에 돌아가고 싶은 고향의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물레방아에서 흘러나온 물소리, 버드나무와 오래된 그루터기, 진흙 묻은 기둥과 벽돌,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 존 컨스터블



존 컨스터블, <느릅나무 몸통 연구>, 1821년, 30.6 x 24.8cm / 루시언 프로이트, <컨스터블을 따라>, 2003년, 에칭, 31 x 24cm


<건초 마차>와 같은 해에 제작된 <느릅나무 몸통 연구>에 나처럼 깊은 인상을 받은 화가가 있었다. 독일에서 나치를 피해 영국에 귀화한 17살의 루시언 프로이트(Lucien Freud, 1922~2011)는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모사를 시도했지만 너무 어려워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영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로 자리매김한 그는 마음속에 자리한 이 작품을 80세경에 에칭으로 모사했다. 크기는 비슷하지만 판화라 좌우가 바뀌었고 원본과 약간 다르게 묘사되었다. 유화의 색채와 물질성을 느낄 수는 없지만 프로이트는 거친 선과 흑백의 강렬함으로 컨스터블의 느릅나무를 부활시켰다.

 


존 컨스터블, <목초지에서 본 솔즈베리 성당>, 1831년, 캔버스에 유채, 153.7 x 192cm, 테이트, 런던


아내의 병세가 악화되자 컨스터블 가족은 1824년부터 남부 해안 휴양지인 브링턴(Brighton)에서 지냈다. 하지만 몇 년 후 일곱째 아이를 낳고 아내는 하늘로 떠난다. 컨스터블은 세상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며 깊은 슬픔에 빠졌다. 햄스테드로 돌아가 작업을 이어갔지만, 그의 풍경화는 점차 침울하고 거칠어진다.


아내가 죽은 지 3년 후에 제작된 걸작 <목초지에서 본 솔즈베리 성당>을 보면 화가의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지고 어두워졌는지 느낄 수 있다.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구름과 잿빛을 띈 성당이 멀리 보이고, 가지가 잘려나간 나무들과 주변의 무성한 잡초들은 생기를 잃고 말라 있다. 왼쪽 중경에 보이는 무덤 표지는 아내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교회가 상징하는 믿음과 부활, 그리고 하늘에 희미하게 드러난 무지개와 햇살이 폭풍우 같은 감정의 격변 이후에 다가오는 희망을 암시한다. 컨스터블에게는 아직 일곱 아이들이 있다.



존 컨스터블, <햄스테드에서 나무뿌리>, 1831년, 종이에 연필, 22.7 x 18.4cm/ <햄스테드 웨스트엔드 들판의 나무들>, 1833년, 23.5 32.7cm


객관적인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던 컨스터블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 점차 자연을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 말년의 나무 드로잉을 보면 이전에 비해 서정적이며 쓸쓸한 기운이 맴돈다. 컨스터블은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근대 풍경화의 시초이자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가로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풍경화가는 겸손한 마음으로 들판을 걸어야 한다. 오만한 자는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한 화가는 수많은 스케치와 풍경화를 통해 마주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감정의 스펙트럼을 느끼게 해 준다.


존 컨스터블, <물푸레나무>, 1835년경, 99 x 66cm, 종이에 연필과 수채, 빅토리아 알버트 미술관,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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