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존의 불안과 분투
청년 때 에곤 실레의 그림을 들춰볼 때면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그 은밀하고 적나라한 표현에 가슴 졸이곤 했다. 노골적인 누드화는 죄책감과 해방감이 버무려진 야릇한 감정을 선사했고,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생긴 화가의 앙상하고 비틀린 자화상은 기괴하고도 불안했다. 그만의 선과 색채, 감성으로 표현한 풍경화는 자연과 마을 속의 수많은 삶과 흔들림을 전달했다. 나무만을 주목한 그림도 상당수인데, 주로 가을의 황량하고 쓸쓸한 나무를 주인공 삼은 것이 흥미로웠다. 모든 장르에서 실레는 그만의 감성과 미감으로 유일무이한 언어를 창조했다.
청년 실레가 그린 <늦가을의 작은 나무>다. 잎을 모두 떨군 작은 나무 하나가 언덕에 서 있다. 자유분방한 붓질로 묘사된 회색 톤의 하늘과 어둡고 거친 땅에서 늦가을의 추위와 스산한 바람이 느껴진다. 앙상한 나무의 가지가 휘고 꺾이며 사방으로 뻗어 있는데, 몸통과 오른쪽으로 뻗은 가지는 마치 다리 같고 위쪽에 가지들은 팔과 손가락처럼 보인다. 뼈와 관절이 두드러진 형상이다. 헐벗은 나무는 홀로 추위와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서 있다. 사람처럼 의인화된 나무는 더욱 다양한 은유를 전한다. 그 모습은 홀로 분투하는 자의 고독으로, 고난에 저항하는 몸짓으로, 거친 환경을 즐기는 춤으로도 보인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는 19세기말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교에 있는 툴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툴른의 역장이었기에 집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실레는 활기 없는 학교를 감옥으로 여겼고, 어려서부터 집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는 것에 몰두했다. 그런데 신경성 매독에 걸린 아버지가 점차 미치광이처럼 굴기 시작했고, 어머니도 감염되며 두 아이가 사산되고 장녀도 열 살 때 사망하기에 이른다. 아버지의 병으로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와 여자 형제로 둘러싸인 가정환경은 실레의 정신세계와 이후 작업에 큰 영향을 끼친다. 결국 190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1906년 16살의 실레는 바람대로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고전 조각과 모델 데생에 집중한 아카데미 교육에 실레는 곧 염증을 느꼈고, 1907년 빈 미술계의 대부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를 찾아간다. 클림트를 주축으로 1897년 설립된 빈분리파는 아카데미즘에서 탈피해 삶과 미술의 교류를 추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미학을 제시하며 전위적인 예술가들을 결집하였다. “나는 실레가 되기 위해 클림트를 거쳐야 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실레는 초기에 클림트의 장식적이고 평면적인 화풍을 시도했다. 아카데미 교수들과의 골이 깊어지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1909년 뜻을 같이한 동료들과 ‘신예술가그룹’을 결성한다. 스무 살도 되기 전에 클림트의 화풍에서도 벗어나 자기의 언어를 구축해 나간다.
“새로운 예술가는 무조건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는 창조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매개되는 것 없이, 즉 과거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이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혼자서 자기 내부에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 에곤 실레, 1909년 신예술가그룹 선언문 중에서
이 시기 반 고흐와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이 비엔나에 전시되며 화가의 주관적인 감정과 내면을 표현한 표현주의 언어가 소개된다. 클림트는 고흐의 해바라기에 영감을 받아 자기만의 해바라기를 남겼다. 고흐가 고갱을 기다리며 화병에 담긴 해바라기 다발을 그렸다면, 클림트는 아름다운 정원에 풍성하게 자란 키 큰 해바라기의 초상을 담았다. 실레도 클림트를 따라 해바라기를 여러 차례 그렸다. 어린이 키 정도 되는 길쭉한 해바라기는 작고 화려한 꽃들 사이에 홀로 우뚝 서 있다. 꽃잎을 떨군 유난히 큰 검은 얼굴의 해바라기는 더욱 외롭고 처량해 보인다. 오른쪽에 해바라기도 한창을 지나 잎은 갈색으로 변하고 꽃도 생기를 잃어 고개를 떨구고 있다. 클림트가 주변과 어우러진 꽃의 풍성한 자태에 관심을 두었다면, 실레는 그 화려한 모습이 쇠락해 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모든 것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 - 에곤 실레
실레는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그리면서 인간 실존의 불안과 욕망을 탐험해 갔다. 미술계 지인들의 초상화는 물론 병원에서 본 병자와 임산부, 신생아의 몸을 스케치했다. 특히 1910년부터 다양한 몸짓과 감정을 연출하며 열정적으로 자화상을 그렸고, 옷을 벗어던져 몸을 탐색해 나갔다. 데생 실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육체를 왜곡하고 비틀며 어두운 색채로 거칠게 묘사했다. 앙상하게 마른 몸에 얼굴은 일그러지고, 관절은 불거지며 털과 주름이 강조되고, 성감대는 붉게 물들었다. 때론 실험적인 포즈를 연출하거나 해체, 절단된 몸으로 표현해 삶의 불안과 내재된 죽음, 여과되지 않은 감정들,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을 담아냈다. 혈기왕성한 청년 화가에게 몸은 고통과 욕망, 죽음이 작동하는 전쟁터였다. 이런 인식과 표현은 세기말 매독의 유행과 아버지의 성병이 집안을 삼켜버린 죽음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기 세계에 몰입한 화가는 자연이나 풍경에서도 자신을 보았고 그것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때 공포스러운 욕정이 갑자기 몰려와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다.
나는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정말 무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 에곤 실레
실레가 자기의 언어를 구축한 이 시기에 가장 강렬한 나무 ‘초상화’ 두 점이 탄생한다. <사나운 대기 속의 가을나무>는 앞서 소개한 <늦가을의 작은 나무>보다 두 배 크고 앙상한 나무의 움직임도 더욱 극적이다. 회색톤의 얼룩덜룩 채색된 하늘은 거칠고 차가운 대기의 동요를 드러낸다. 사나운 바람으로 나무의 몸통은 오른쪽으로 휘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극적으로 꺾이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다. 잔 가지들도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기력을 다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가지들의 신경질적인 선은 실레의 몸을 묘사했던 비틀리고 진동하는 선과 닮았다. 거미줄처럼 뻗은 가지들이 하늘을 분할하는 독특한 구성은 그림을 추상화로 변화시킨다.
실레는 자연을 관찰하며 사실적으로 기록하기보다 주로 기억에 따라 그렸다. 그가 말했듯이 자연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인간의 몸과 같은 움직임, 인간이 겪는 다양한 감정을 떠올렸다. 특히 이 작품은 같은 해 실레에게 일어난 사건과도 연관될 것이다. 1911년 도시와 인간에게 지친 실레는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17살 모델 발리 노이칠과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어 노이렝바흐로 이사했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튀는 남녀의 동거와 누드 드로잉 작업은 스캔들이 되었고, 급기야 실레는 작업실을 드나들던 한 소녀를 유괴한 죄로 3주간 구류되었다. 고소가 거짓으로 밝혀졌으나 작업실에 있던 외설적인 누드화가 문제가 돼 3일의 징역형을 살았다.
감옥에서 실레는 “예술가가 작업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움트는 싹에서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나는 나의 예술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후까지 기꺼이 견뎌낼 것이다”라고 했다. 된통 홍역을 치른 스물두 살의 화가는 자신을 모진 바람에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나무로 비유했다. 나무로 표현한 자화상인 셈이다. 자세히 보면 나무는 물음표 모양인데, 마치 ‘왜,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느냐’라고 묻는 듯하다. 이 그림은 단순히 바람에 춤추는 나무의 초상이 아니다. 자연의 성장과 저항뿐만 아니라 역경 앞에 분투하는 인간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지금 산, 물, 나무 꽃들의 유형적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인간의 몸과 비슷한 움직임, 인간이 겪는 기쁨과 고통과 흥분을 떠올리게 됩니다”
- 1913년 8월 실레가 컬렉터에게 보낸 편지
노이렝바흐 사건 이후 실레는 오히려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두 작품은 쌍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지만,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를 제목으로 가을의 나무를 중요 모티프로 등장시킨다.
먼저 떠오르는 해의 광휘로 빛나는 <가을 태양>을 살펴보자. 아침햇살로 하늘이 온통 미색이라 언덕 위에 가냘픈 두 나무가 돋보인다. 부목의 도움으로 겨우 서 있는 두 나무는 잎을 많이 떨군 상태다. 구불구불 휘청거리며 뻗은 가지에 여전히 매달린 노란 잎들이 햇살에 반짝인다. 그 잎들도 곧 떨어져 나갈 테지만 두 나무는 부목에 의지해 추운 겨울을 묵묵히 견뎌낼 것이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서로에게 가닿을 수 없을지라도 함께 있는 모습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가을 나무는 전방위적으로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며 계절을 전한다. 나뭇잎들은 화려한 색채로 변하고 어느새 시들어 가면서 하나둘 나무와 작별한다. 몸을 스치며 떨어지는 잎, 바닥의 낙엽을 밟을 때 소리와 향취는 계절을 온몸으로 감각하게 한다. 실레는 풍성함이 쇠락해 가는 계절 가을에 매료되었고, 그 우수를 풍경에 담았다.
<석양>은 앞의 작품과는 다른 풍경과 화사한 색채를 보여준다. 해가 지며 어두워진 전면에는 (침식된 석회암 대지인) 카르스트 지형에 초록풀과 작은 꽃이 뒤덮여 있다. 그 뒤로 바다와 두 개의 섬이 보이는데, 석양으로 하늘까지 모두 분홍과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중앙에 잎을 많이 떨군 두 밤나무 사이로 저무는 해가 보인다. 이제 빛과 온기, 이 색채들도 어둠에 가려질 것이다.
이 작품은 실레에 대한 비평과 책을 쓴 저술가 아서 뢰슬러(Arthur Roessler, 1877~1955)가 책상 위에 걸어놓았던 작품이자 에곤 실레 최대의 컬렉션을 소유한 루돌프 레오폴트(Rudolf Leopold, 1925~2010)가 구입해 각별하게 생각했던 작품이다. 레오폴트는 이렇게 깊고 우울한 하늘은 이전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가라앉고 있는 이 태양이 다시 떠오르기나 할까 의구심이 든다고까지 말했다. 화사한 색채 때문인지 나로서는 그런 깊은 우울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떠오르는 해와는 다른 우수의 분위기가 스며있다. 늦가을의 나무와 저무는 해가 둘 다 인생 단계의 마지막, 죽음 직전을 암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루돌프 레오폴트의 오천여 점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설립된 레오폴드 미술관이 궁금하다면 (영상을 보면 실레의 여러 작품들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vyQUn2qKTw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다음 해 징집이 가까워지자 실레는 발리 노이칠과 4년간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이웃 여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다. 프라하, 이어 빈에 배치된 와중에도 실레는 부인과 가깝게 거주하며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사랑과 자유가 아닌 현실과 안정을 선택한 삶과 시선에 따라 그의 작품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보다 자연스러운 형태와 다채로운 색채를 구사하며 빈 미술계에서 클림트를 잇는 차세대 주자가 되었다. 전시(戰時) 상황이었지만 전시가 호평을 받고 작품도 팔리는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8년 임신한 아내 에디트가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하고, 28살의 실레도 감염되어 3일 만에 사망하게 된다.
말년에 그린 비교적 큰 <네 그루의 나무>는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실레의 풍경화다. 이전보다 안정된 형상과 석양의 풍부한 색채가 눈길을 끈다. 지는 해는 하늘을 다양한 색채의 결로 채색했고, 주인공 밤나무 네 그루는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이제 뒤틀리고 꺾이는 가지는 찾아볼 수 없다. 이 가을 나무들에 매료된 실레는 거기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사람들처럼 나무도 각기 다른 모양과 속도로 성장하고 쇠한다. 풍요롭거나 빈약하게, 안정되거나 위태롭게 보이기도 하고, 다른 이들보다 더 빨리 마지막에 도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다른 어우러짐이 전체의 풍경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만들며, 어떤 것도 다른 것 우위에 있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씨앗을 펼쳐낼 뿐이며, 실레의 말처럼 쇠퇴해 가지만 본래의 새로운 영혼으로 무언가를 탄생시킬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계속적으로 쇠퇴해 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쇠퇴란 늙는 것, 혹은 본래의 새로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만남을 통해, 섞임을 통해 뭔가를 원하고 취할 것이며, 또한 탄생시킬 것입니다...”
- 실레가 컬렉터이자 의사인 오스카 라이헬에게 보낸 편지 중(1911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