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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버킷리스트 May 19. 2024

왕실도서관 규장각

도서관사를 배우면서 왕실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대 도서관이 있듯이 우리나라 조선시대 왕실도서관 규장각이 있다. 규장각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어  이 주제로 정한 뒤 발표했다.




조선시대 왕실도서관은 크게 집현전, 홍문관, 규장각이 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 때, 홍문관은 성종 때, 규장각은 정조 때 흔히 알려져 있다. 하고 많은 것 중 왜 규장각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이는 규장각은 추분날 초저녁 동편에 뜨는 별로 학문을 관장하는 규성으로 임금의 문장이 빛나는 건물이라 한다.




정조시대의 규장각


규장각은 역대 조선의 왕이 직접 쓴 글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도서관이다. 1776년 조선 제 22대왕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규장각을 창덕궁에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단지 도서관에 머물지 않았고 새로운 국가건설의 첫걸음으로 이어 나갔다.



창덕궁의 규장각 건물 중 주합루(규장각)는 학문 연구와 정조의 어제, 어필 보관하는 곳이고 이안각은 책을 말려서 습기를 없애는 곳이다. 서고는 국내 서적 보관하는 장소이고 개유와 열고관은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 보관하는 장소이다.


정조의 철저한 보호속에서 학문에만 연구했던 각신들이 있었다. 이 각신들은 조선 최고의 요직이자 가장 명예로운 벼슬이므로 특히 초계문신제도라고 정조는 인재양성을 위해 젊고 유능한 사람을 37세 이하 인재를 발굴하여 규장각에서 3년 정도 교육을 시켰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김조순 등 정조 재위 24년간 142명 선발하였다.


교남빈흥록에 의하면 인재선발의 원칙은 실력으로 따졌고 당파와 지역 또한 출신 가리지 않았다. 특히 규장각의 초대검서관이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박제가로 이들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정조는 각신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고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개혁정책을 규장각을 통해 이뤄졌는데 이는 최고의 인재양성소이자 개혁정치의 산실이었다.


또한 정조는 규장각을 만든 후 중국도서 수입에 힘을 썼다. 예를 들어 거금을 들여 수입한 청대의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이 있는데 1781년까지 규장각이 보유한 외국서적은 6백 여종 총 2만여권이었다.


서양기술을 최초로 중국에 소개한 과학책이 있는데 정양욕이 한강에 배다리 놓을 때와 수원성 싸을 때 거중기를 고안하여 공사에 도움이 되었는데 이는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하듯 규장각이 수집한 나라 밖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서유구가 만든 임원경제지, 조선의 종합무예서인 무예도보지, 규장각의 제도와 법규에 관한 책인 규장각지 등이 있다. 


정조가 직접 편찬한 서적과 신하들에게 명하여 편찬한 책 모두 153종 3,991권이었다. 이렇게 만든 서적은 규장각,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정족산 등에 나눠서 보관했다. 





고종시대 규장각

정조의 죽음과 함께 규장각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졌지만 개화와 근대 지식에 관심이 많았던 고종에 의해 잠시 회복되었다. 하지만 1886년 프랑스군 외규장각 의궤 약탈 사건이 있었고 1910년 일제이 의해 폐지되었다. 



일제시대 규장각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귀국하던 1909년 이토가 77종 1,028책을 가져갔다. 물론 1966년 6월에 11종 90책을 돌려받았으나 나머지는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한국 강점과 더불어 규장각이 사라졌고 10만 책의 제실도서는 이왕직 임시 관리하였고 1911년 취조국이 인수, 1919년 학무국 인수, 1922년 의궤류 166책 궁내성으로 반출 등 이삿짐처럼 옮겨다닌 규장각 도서들이 나중에는 창덕구에서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이때 홍문관, 시강원 등 다른 기관의 도서와 지방 사고 도서를 통합하였다.


1930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도서관 중공하여 16만여 권 이관하였고 해방 직후 1945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이관하였다.



한국전쟁 시대 규장각

1950년 6월 25일 갑작스러운 한국전쟁으로 피난 대책이 세워지지 않아 도서관에 국보급 장서는 남겨두고 피난하였다. 9월 28일 서울이 일시적으로 수복된 후 그 해 겨울 다시 북한군이 밀려오자 국보급 장서를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으로 긴급히 대피하였다. 


당시 문교부장관 백낙준이 귀중 도서를 이송하기 위해 미군 트럭 8대를 동원하였고, 그중 5대가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 등 귀중 도서의 이송에 배정되었다.



이러한 결과 이들의 사명감과 노력으로 조선의 역사가 후대에 남겨지게 되었다.


규장각 현재

1975년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규장각도서관리실 설치

1990년 규장각 건물 완공

199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독립

2006년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와 통합,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발족하게 되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은 한국 최고의 고서 도서관이자 박물관으로 현재 고도서 17만 5천여 책, 고문서 5만여점, 책판 1만 8천여 점 소장하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역할은 소중한 문화 유산의 영구보존을 위해 훼손된 자료의 복원과 관리를 하고 한국학 자료의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연구,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 전시, 교육, 홍보 등의 업무 수행한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소장한 20여 만점의 기록문화유산은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가치있는 문화재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기록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일이 있는데 기록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못하고
혹 전해지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어제 한 일을 오늘 잊는다면
제도를 만들어도 다시 없어지고
의식을 정하여도 다시 문란해질 것이니
어찌 참조할만한 기록이 있음만 하겠는가
-정조가 쓴 규장각지 서문-



참고문헌

한영우(2008), 문화정치의 산실 규장각, 지식산업사

손주현(2023), 정조의 개혁 본부 여기는 규장각, 책과함께어린이

규장각한국학연구원(https://kyu.snu.ac.kr)

규장각 세계기록 유산 특별전(우리의 기록 인류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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