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아랍에미레이트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 J를 만나러 다녀왔다. 일주일 동안 혼자 리옹을 여행했고 짧게 둘이 남프랑스 여행을 하고는 라스알카이마로 갔다. 늘 내가 꿈꾸던 휴가를 라스알카이마의 리조트에서 보냈다. J는 출근을 했고 나는 리조트에서 먹고 쉬고 책도 읽고 바닷가 조깅도 하고 수영도 하고 J가 퇴근해서 오면 맛있는 거 먹고 끝없는 수다의 마라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내뱉던 내게 J가 툭하고 뱉은 한마디.
"왜 니 얘긴 없어? 못 본 지 5년이 지났는데 지난 5년 동안의 니 얘긴 왜 없어?"
"응?"
"너 계속 그냥 누구누구는 요즘 이렇다더라 하는 얘기만 하잖아. 왜 니 얘긴 하나도 없어?"
"아... 나? 나는 뭐 할 얘기가 없어. 그냥 매일이 똑같아, 특별한 게 없어. 일어나서 일하고 점심과 저녁을 챙겨 먹고 낮에 가끔 요가를 하고 저녁엔 동네를 걸어. 주말이면 조카가 놀러 오고."
"그렇구나. 매일이 비슷하구나?"
"응. 매일이 비슷해. 근데 나 언제부터인가 잠을 잘 못 잔다? 새벽에 계속 깨. 한 1,2년 된 것 같아. 두 시간 정도 자면 깨는데 다시 잠드는데 조금 힘들어. 총 수면 시간이 많이 줄었어. 하루에 5시간 정도 자는 것 같아. 전엔 7시간에서 8시간 정도 잤는데."
"밤에 자꾸 깨?"
"응. 그냥 자다가 갑자기 눈이 스르르 하고 떠져. 그리고는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버려."
"너,, 잘 때 그냥 깨는 거 아닌 것 같아. 나랑 있는 동안 늘 자다가 새벽에 소리를 질러."
"내가? 나는 여태 살며시 눈이 떠진다고 생각했는데?"
1인 가구인 나는 늘 혼자 잠들기 때문에 나의 잠버릇도 잘 모른다. 옆 침대에서 일주일을 넘게 함께 하던 J는 내가 매일 새벽 비명을 지른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비명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2년 가까이 그걸 모르고 살았다.
짧은 겨울방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고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인사팀에서 전체 메일이 왔다. 회사는 심리 상담을 지원하고 있으나 예약을 하고 받아보라는 것. 그 쯤 회사 근처 건물에서 직장인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발생했고 회사에서 심리상담을 지원하는 복지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안내해 줬다. 회사 7년 차에 처음 들었던 복지 프로그램이었다. 전부터 있던 프로그램이었으면 진작 좀 안내해 주지 하는 생각을 하며 단체 메일을 그저 흘려보냈다. 몇 주쯤 지났을 때 회사 동료로부터 그 프로그램이 굉장히 괜찮으며 심리상담 센터가 굉장히 많고 그중에서 선택을 하면 되는데 동료가 다니는 곳이 괜찮다며 추천을 해줬다. 있는 복지 나도 이용해 볼까? 하는 마음에 나도 같은 센터로 심리상담을 신청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심리 상담을 받게 되었다.
첫 심리상담은 그저 편하게 수다를 한바탕 하고 온 느낌? 심리 상담을 받을 만큼의 고민도 없었고 스트레스도 없었다. 나를 상담해 준 선생님은 TCI와 MMPI2 검사를 권유하셨고, 나는 그렇게 온라인으로 그리고 오프라인 설문지를 통해 두 개의 심리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심리검사를 받은 내용에 대해서 설명을 들으러 센터를 방문했다. 담당 선생님은 TCI 결과를 먼저 설명해 주시고는 MMPI2 결과를 설명해 주셨다. 결론은,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의심이 되며, 특히 우울증과 관련된 지표의 점수가 너무 높아 약물치료를 권유하셨다. 우울증과 관련된 지표는 1점만 더 올라가도 무기력증으로 갈 수도 있다고 하셨다. 우울증이라니 나는 너무나 당황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저는 우울한 감정을 모르겠어요.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거나 심심하긴 해도 우울하진 않아요. 심심하면 재밌는 일을 찾으면 금방 해결이 되고요. 살면서 우울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저는..."
"우울증이 우울하지만은 않아요.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 금방 좋아질 것 같아요. 병원 예약 잡으시면 검사 결과지는 바로 병원으로 전송해 드릴게요."
살면서 이렇게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우울증? 그게 뭐지? 집에 돌아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운영하는 유튜브와 블로그를 통해 우울증의 증세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지난 2년 동안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오래전부터 겪었던 내 몸의 증상들 감정이 아니라 몸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에 대해서 의사들은 말하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수면의 변화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학생 때 시험기간처럼 수면이 부족해서 주말에 잠을 몰아서 자거나 하는 그런 수면 부족이 아니었다. 나는 새벽에 계속 깨고 수면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그리고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워낙 게으르고 잠이 많았던 나는 그냥 게으른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달랐다는 걸 우울증이란 단어와 함께 깨달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몸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그냥 침대가 늪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벌떡 일어나 앉아있었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아침마다 몇 시간씩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저 나는 게으르니까 이런 줄 알았다. 음식을 마구 먹기 시작했다. 가끔은 위가 당기면서 고통스러워하는데도 음식을 끊임없이 씹고 삼키고 있는 내 모습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음식을 먹고 있었다. 이런 부작용으로 살도 15kg이나 쪘다. 그저 코로나를 핑계로 살이 쪘다고 생각했다. 이런 변화는 자연스럽게 아주 조금씩 나에게 일어났다. 그저 나는 게으른 사람이니까 운동을 싫어하니까 등등의 핑계를 대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우울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병원의 문턱은 높았다. 많은 검색을 해보았지만 쉽사리 병원을 예약하지 못했다.
친한 친구에게 이 모든 사실을 다 털어놓았을 때 며칠이 지나고 나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병원 예약은 했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 안부 전화를 며칠에 한 번씩 해주었다. 친구의 아내로부터도 전화를 받았다. 과거 우울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던 경험을 공유해 주었다. 친구의 아내는 운동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친구의 걱정이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동안 나의 몸 상태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우울증일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몸을 움직이고 자제를 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하면서 나에게 사랑을 주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 붙어 버린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우울증일 수 있다고 스스로 외치면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곤 밖으로 나가 가벼운 산책과 조깅을 하면서 나를 보살폈다. 자다가 깨는 날에도 그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잠들려고 노력했다. 겨울보다 봄의 봄보다 여름의 나의 컨디션은 좋아졌다. 자다가 깨는 일도 줄었고 7시간 가까이 푹 잠이 들었으며, 건강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
결국 나는 병원엘 가지 못했다. 어쩌면 우울증일 수도 있었던 내가 주변의 걱정과 나의 노력으로 거의 치료가 다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금 몸이 가라앉고 음식을 탐하고 잠을 잘 못 자기 시작했다. 침대가 아니면 눕지도 않는 내가 거실바닥에 누워 몇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머릿속으로는 얼른 몸을 일으켜 씻고 정리를 해야 하는 데를 끝없이 생각하고 있지만 내 몸은 강력 접착제로 거실 바닥에 붙여 놓은 것 같다. 또다시 나는 우울증일 수도 있어! 를 외치며 내가 나를 돌봐야 하는 시기가 온 것 같다. 마치 사인 함수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끝없이 반복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평생을 이렇게 스스로 돌보고 사랑을 주면서 살아야 할 수도 있다. 가끔은 심심하지만 그래도 늘 즐거운 나는 어쩌면 우울증일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