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적인 오류들의 기록_03
몸의 면역력이 낮아지는 시기가 있듯이, 정신의 면역력도 낮아지는 때가 있나 보다. 언젠가 한 번 대차게 코로나를 앓고 난 뒤에 자질구레한 병들에 취약해져 버린 내 몸처럼, 정신도 큰 병을 앓고 나면 체질이 바뀌듯 무언가 바뀌는 건가 싶다.
병원에 가서 진단도 받았던 우울증이었지만, 약을 흐지부지 먹다 끊었음에도 나아졌던 터라 아, 사실 우울증이 아니라 그냥 우울했던 시기쯤 됐나 보구나-했었다. 그렇게 지내온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일을 시작한 덕분도 있겠지만, 우울은 더 이상 내 인생에 음침한 그늘을 드리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만, 온대 기후처럼 보였던 마음은 늘 무거운 습도를 머금은 하늘이었다. 내가 살던 고향의 날씨나 이곳 독일의 날씨처럼, 언제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들이칠지 모르는 변덕이 어딘가에 있었다.
처음 느꼈던 우울증의 무게감은 관성처럼 내 몸에 남아있다. 다시 그 느낌에 스멀스멀 젖어가기 시작하면 나는 집중력을 잃고 쉽게 손과 머리를 바닥으로 떨군다. 무언갈 잡던 손도, 미소도, 시선도, 말꼬리도 전부 바닥으로 떨군다. 애써 달아나려 하는 행동들엔 일관성이 없어 열 개의 할 일을 해치워도 하나도 보람되질 않는다. 나를 마주하는 사람에게 볼품없는 말과 생기 없는 표정만 전하게 된다. 말은 점점 내 안으로 기어들어간다.
내 정신의 방어기제는 센서가 약간 고장 나서 사소한 것에도 향수를 뿌려대는 탈취제 꼴이 돼버렸다. 우울의 시작과 동시에 이 싸구려 탈취제? 는 보호와 정화라는 명목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픔이 될만한 것은 전부 잊게 만드려고 하다 보니, 우울과 고난, 다툼 끝에서 내가 마음속에 남겨야 할 약속과 다짐마저 부정적 감정들과 구분 없이 없애려 한다. 결국 그 지독한 향에 머리만 아파진다.
이 엉겨 붙고 찐득거리는 우울을 잘 풀어내지 못하면 어느새 나는 미라처럼 꽁꽁 묶인 꼴이 되어버릴 것이다. 감기는 몸이 스스로 병균과 싸워 이겨내느라 열이 나고 근육통에 지끈거린다지만, 지금 이 혼란과 상실감과 우울은 대체 뭘 남기려고 기운을 쏙 빼가나?
언젠가 이 기분과 고통과 고민도 탈취되고 말겠지만, 그래서 나아지겠지만, 정말 나아지는 게 뭔지는 더욱 고민해봐야 할 일이다. 그래야 날 마주하는 그 사람에게 확신이 담긴 말과 힘 있는 손으로, 의심 없는 미소로 보답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