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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사개미 Nov 24. 2024

달팽이

 뒷산 봉우리 사이로 연푸른색 하늘과 희뿌연 안개구름이 차분히 흘러가는 이른 아침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물방울들이 진동하는 소리와 이따금 주위의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외엔 내 옆의 친구가 개미와 쥐며느리가 너무 많다며 발로 땅을 지지는 소리뿐. 바닥엔 나뭇잎과 색을 잃은 꽃잎 그리고 곤충 시체들. 햇살에 마르고 사람에 치이고, 밟히며 죽어간 수많은 것들.

 나는 문득, 달팽이가 떠오른다. 습한 날을 좋아하는 달팽이가 지금도 내 주변에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부연 안개의 수증기 같은 생각이, 나와 잠깐의 시절을 함께 했던, 내게 그 작은 존재 이상의 가르침을 줬던 선생들을 떠오르게 하며 추억으로 스며왔다. 


 달팽이. 사람들의 기억 속엔 저마다의 달팽이가 있을 테지만, 내겐 달팽이의 인상이 유독 특별하다. 비가 와 하늘이 심드렁하게 머리 위로 가까워져 있는 날엔, 한두 마리씩 모습을 드러내 촉촉이 젖은 풀에 자신들의 몸을 적시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도 역시 달팽이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테지만, 추억에 젖어 야생의 달팽이를 찾아다니기엔 바쁜 삶 속에 치이며 지친 나에게 달팽이를 찾을 여유나 그만큼의 낮은 시선은 지워진 지 오래인 듯하다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내가 그들을 다시 만나기 전엔, 달팽이는 내게 약한 인상에 불과했었다. 작은 힘에도 깨지기 쉬웠고, 세상에 비해 너무도 작았고, 손목처럼 창백하고 여린 존재였다. 어릴 적 내 주변 아이들은 이런 달팽이를 소금으로 잔인하게 괴롭히기도 했었다. 생명의 가치란 말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그 때여서, 달팽이뿐만이 아니라 개미나 사슴벌레 같이 작고 약한 생명들은 어린아이들의 잔인한 장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편으로 가엾어하면서도, 가만히 방관만 할 뿐이었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너무 작고 보잘것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책임하고 어린 생각은,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조금의 호기심만 가진 채 만났던 두 마리의 달팽이들로 인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학교 과제의 관찰대상을 물색하던 중, 내 기억 속 한 편에 깊이 숨어있던 달팽이를 재회할 수 있었다. 노란 플라스틱 몸체와 투명한 플라스틱 패각을 가진 플라스틱 달팽이, 그리고 그 속에 들어있는 ‘진짜’ 달팽이들. 대형마트에서 다시 만나게 된 이들에겐 가격이 붙어있었다. 내가 손에 들고 움직이기 시작하자, 작은 백옥 같은 달팽이들이 패각 속에서 나와 몸과 더듬이를 길게 내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대되는 건지, 두려워서 그런 건지 모를 움직임으로.

 내가 데려온, 아니, 사온 달팽이들은 그렇게 내 방 안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을 닮은 이 생명들이 온통 인간의 물건뿐인 좁은 방안에 들어와 있으니 그들의 세상인 작은 플라스틱 통과 그 속의 흙더미는 도무지 그들에게 위안이 될 수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주 그들을 꺼내어 내 팔 위나 얕은 물웅덩이에 놓아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달팽이들은 놀란 듯 잔뜩 움츠렸다가 이내 용기를 내 꼬물꼬물, 꾸물꾸물 앞으로 나아갔다. 그 고요한 움직임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풀기에 앉은 달팽이들을 바라보던 그때의 나처럼, 조용한 즐거움에 찬찬히 젖어가곤 했다. 이후 나는 이들에게 꼬야와 꾸야라는 이름을 각각 붙여주었다. 꼬야와 꾸야는 날이 갈수록 크게 자랐고, 그러지 않아도 작은 플라스틱 통이 더욱 답답해 보일만큼 크게 자라 있었다.

 패각의 줄무늬 모양으로 간신히 구별이 가능한 이 둘은, 너무도 닮은 외양과는 다르게 그 각자의 성격이 판이했다. 의인화를 보태 설명하자면, 꾸야는 소극적이고 예민하며 활발하지 못한 반면에, 꼬야는 활동적이고 적극적이며 호기심도 강했다. 이 둘의 차이는, 미숙한 나의 실수로 인해 더욱 극명해져 버렸다.

 여느 때처럼 밥을 주기 위해 통을 들어 올리다가 그만 실수로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들이 짊어진 커다란 패각은 그 위용에 비해 그리 단단하지 않아서, 추락의 충격을 다 막아주지 못하였다. 꾸야의 패각은 금이 가고 깨져버렸고, 나는 그저 꾸야의 패각 사이로 흘러나오는 거품으로 이 존재의 충격과 아픔을 지레짐작할 뿐이었다.

그 후로, 여전히 활발한 꼬야는 꾸야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바쁘게 움직이며 커져만 갔다. 이런 모습을 보며 괜스레 꼬야에게 미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에 비해 꾸야는 더더욱 소극적이게 되어 내 손길의 작은 충격이나 스침에도 크게 놀라 패각 안으로 몸을 숨기곤 하였다. 상처를 치료하려는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꾸야의 움직임은 더더욱 더뎌지기만 했고, 흙속으로 들어가 줄곧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이 작은 존재는, 으스러진 껍질 사이로 새어나가는 생명의 온기를 흙속에 간신히 붙잡으며 천천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듯했다.

불안한 마음에 매일 흙을 걷어가며 꾸야의 상태를 확인하기를 며칠, 외출 후 돌아와 바라본 플라스틱 통 안엔 텅 빈 불안만이 가득해 보였다. 흙을 걷어내고 둘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그들은 흙속에서 나란히 패각 안에 몸을 넣은 채 잠들어있었다. 손으로 들어 올리자, 꼬야는 천천히 잠에서 깨어 고개를 빼놓고 나를 안심시켰지만, 꾸야는 패각 안에서 힘없이 흘러내려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 모습도 충격이었지만, 내가 처음 책임지고 기른 생명의 죽음을 보며,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실수에 대한 부끄러움과, 이 작은 생명을 조심히 다루지 못했던 나의 무지함이 나를 더더욱 어지럽게 했다.

 꾸야를 집 앞 화단에 깊이 묻어준 뒤 집에 돌아와 보니, 꼬야는 텅 빈 흙속을 헤매고 있었다. 마치 사라져 버린 꾸야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꼬야는 꾸야의 죽음이 너무 외롭지 않게 조용히 옆에 같이 잠들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닮은 동면으로 그 차가운 시간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모습들에 생각이 미치자, 이 작디작은 생명들은 더 이상 나에게 관찰과제용 대상이 아니었다. 패각과 흙속은 그들만의 우주였고, 그들을 관찰하기 위한 투명한 플라스틱 통은 내 욕심일 뿐이었다. 생명의 특별함과 개성, 그리고 소중함을 이 작은 생명들보다 몇 배는 클 내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이 나를 괴롭혔다. 섬세하고 조용한 꾸야에 비해 그를 잡는 나의 손길은 너무 뜨겁고, 거칠고, 가혹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꾸야는, 날 원망하는 목소리 하나 없었다. 그 몸짓마저 없었다. 모든 걸 조용히, 천천히, 혼자서. 그래서 더 마음이 쓰이고 무겁다. 이들은 말없이 가르침을 주는 先生이었다. 이들로 인해 나는 작은 생명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방관하던 어릴 적 모습을 버릴 수 있었고, 작은 존재에 대한 선입견의 안경을 깨버릴 수 있었다. 


 난 언젠가 달팽이였고, 달팽이들을 만나며 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으로 돌아와, 꾸야와 꼬야를 떠올리며 나를 다시금 되돌아본다. 내게 그 작은 존재 이상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 두 마리의 커다란 존재들에게 다시 한번, 부끄러움과, 미안함과,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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