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올라와 식탁이 휘어질 만큼 푸짐하게 먹더니, 라테 한 잔을 내려달라고 했다. 다 먹은 상도 치우지 못한 채 난 기꺼이 일어나서 내려줬고, 커피잔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더니 그는 또 늘 하던 말처럼
우유가 너무 많다
라고 한다. 그래서 나도 늘 하던 말처럼 대답했다.
괜찮아, 내가 한 잔 마시면 되지.
그 말을 하고 나니까 갑자기 초코 두유가 생각났다. 그래, 오전엔 블랙으로 마셨으니깐 지금은 그거 조금 섞어 모카를 마셔야겠다. 오후 1시. 이 정도 시간이면 두 번째 카페인도 괜찮겠지, 하며 에스프레소 버튼을 눌렀는데, 아침에 바꿨던 그라인더 설정 때문인지 커피가 찐득하게, 방울방울 힘겹게 떨어진다. 아마 이때부터 감정고장이 난 거 같다. 부글부글. 왜 늘 처음 참은 분노는 이상한대서 터지는 걸까? 다시 차분히 그라인드를 조절하자 이제는 적당히 줄줄 흐르며 내려온다. 살짝 끈적한 농도. 그래, 이거야.
커피 다 됐어
땡큐
밥 먹고 잠시 텀이 생기니 뭔가 씹고 싶은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아까 우유가 너무 많다고 한마디 던진 남편 때문에 난 어딘가 성이 난 거 같다. 3달은 훌쩍 지난 노래방 새우깡이 저 구석에 있다. 몇 개만 먹어볼까? 코끝에서 벌써 새우깡 냄새가 지나간다. 아직 봉지도 열지 않았는데 말이다. 커피 한잔 들이켜고 두 개 집어 먹자마자 머릿속 한편에서 아이디어가 커피와 함께 확 돌아가기 시작한다. 산타 이야기.
산타의 일기
2월까지 오면, 새해의 기세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다.
세상 잡지에 책에 실린 나의 모습은 늘 웃고 있고 인자하다. 사실 나도 350일은 무표정인데 말이다. 셀프 모티베이션조차 필요 없고, 태어날 때부터 ‘열심’이라는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 과연 그런 존재가 있을까? 나도 한 번쯤 아니 999번 상상한 적 있다. 옷과 탈을 벗고 루돌프들을 다시 집으로 되돌리는 상상. 내가 내 시간을 선택한다고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시대와 환경, 일상이 만들어 놓는 때도 있는 것처럼 나의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평생계약직 같은 거랄까.. 오히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가 날 위로할 차례.
매일 마시는 커피의 맛이 어느 날은 쓰고, 어느 날은 달게 느껴지는 그 미묘한 차이. 계량 없이는 우유의 양도 정해진 시간도 미리 손 쓰지 않으면 뭐든 기분 탓이고 날씨 탓이 되어 버린다. 그렇담 난 계량컵과 초시계를 쓰고 싶은 걸까? 각 맞춰진 삶을 살았지만 특별히 자유로울 때 오는 희열이 있다. ‘모든 창의는 모방에서 시작된다’는 유명 작가들의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가 이야길 끄집어낼 수 있는 시작점은 어린 날의 영향, 그리고 나의 외로움, 나의 시선, 나의 고민들에서 시작되며 그 트위스트는 상상력의 끝을 정해놓지 않는 데서 오는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구백구천구십구억 번째의 자유로운 선택을 했고 어떤 사다리 타기보다 희박한 확률로 모든 생각과 경험이 구겨져있는 나의 작은 뇌로 이 글을 써 내려가고 있고 그 타이밍이 어떤 구도로 타고 타고 들어와 그대들도 이 순간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거.
나의 이야기는 산타의 일기로 시작되었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들이 나를 만들고, 그 안에 새로 생긴 카테고리. 산타. 나의 생각과 겉모습은 나를 설명하는 도구가 되고, 내가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나라고, 나타내는 세상에서 우린 살아간다. 그걸 기준으로 삼자면 산타의 모습은 철없던 우리의 시절 중 세상에 좋은 일도 있고 보상이 있다는 희망을 숨 쉬게 해 주던 그 꿈처럼 믿고 있었다. 그리고 행복했던 추억을 나누듯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은 있다고 말해주는 존재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나는 지금 글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난 안다. 이 이야기의 시작과, 이렇게 멈추지 않고 두들기는 타자의 끝은 ‘끝’이라기보다 내가 털어내고 싶었던 무언가를 제대로 끄집어내고 있다는 걸.
얼마 전 아주 유명한 호텔 로비에 들어선 적이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아침 미팅을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저렇게 전 세계를 날아다니며 미팅을 할 거야. 나는 유명한 작가이자 그림쟁이가 될 거야. 그래서 전 세계를 누빌 거야.
그렇게 될 거야. 눈물과 노력으로 꽃을 피울 것이다. 자기 최면이 자신감을 만드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안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만들어가는 이야기. 그래서 결국, 내가 믿는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여정. 작은 분노와 잠깐의 행복으로 이 이야기를 놓을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