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기다림
얼마 전, 내 몸에 딱 맞는 포근한 수면바지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카페를 찾았다. 일부러 찾으러 다닌 건 아니고 감사하게도 우연히 일 보는 중간에 시간이 떠서 처음 찾게 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쓴 글이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면서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좋은 장소로 새겨졌고 그 이후 자꾸만 찾게 된다. 모두에게 오픈된 나만의 아지트랄까. 이 카페에서 글을 쓰는 시간이 나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일 정도로 좋다. 작은 공간에 테이블이 몇 개밖에 없는 곳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학교 앞 학원가에 있고 손님 연령대도 다양하다. 2030이 데이트 코스로 찾아오기도 하고 5060도 많이 오셔서 사장님에게 안부를 묻는다. 아마 이 동네에서 오래되신 것도 있지만 깔끔한 매장과 담백한 커피맛 때문인 것 같다.
제주에 살면서 관광지에 있는 카페나 프랜차이즈 카페보다 생활권에 있는 개인브랜드 카페를 더 자주 가는 이유는 매일 같은 원두를 써도 날씨에 따라, 사장님의 기분과 컨디션에 따라 커피 맛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일정치 않은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나에게는 참 소중하다. 그리고 사장님과 단골손님들 사이에 오고 가는, 함축된 대화 속에서 그들의 인연의 시작과 에피소드들을 상상하는 것 또한 큰 재미다. 카페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카페에서 글을 쓰거나 일을 하며 얻는 소소한 재미이기도 하다.
오늘은 내가 앉는 자리 빼고 나머지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있다. 올 때마다 마주치는 소년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고 지난주에 입었던 패딩을 입고 앉아있다. 내가 매일, 매주 무슨 요일, 이렇게 규칙적으로 오는 것도 아닌데 올 때마다 본다. 둘 중 한 명이 불규칙적으로 오는데 올 때마다 마주치는 것이라면 나머지 한 명이 규칙적으로 그 시간에 매일 오는 것이 틀림없다. 카페에 혼자 와 앉아있는 소년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다. 소년과 몇 살 차이 나지 않은 꼬마를 키우고 있는 엄마인 나의 눈은 자꾸만 그쪽을 향한다. 처음에는 잠깐 엄마나 아빠를 기다리고 있겠거니 했다. 한참이 지나도 그 소년 곁에는 아무도 없다.
초등학교 4, 5학년 즈음으로 보이는 소년이 앉아서 핸드폰을 보며 나오지 않는 음료를 연신 빨아댄다. 밑바닥에 얼마 남지 않은 음료를 연신 빨아대는 빈 빨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데리러 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 머물 곳이 필요해 들른 것일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펼쳐졌다.
빈 빨대를 연신 빨아대는 소리가 매장을 가득 채운다. 마치 자신을 데려가 줄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가, 누군가를, 어디론가 가야 하는 그 시간이 되길 기다리는 지루하고 뻘쭘한 이 시간을 빨리 당기려는 듯한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의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온통 기다림이다. 친척네 맡기고 잠깐 있다가 온다던 엄마는 몇 날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았고 내가 엄마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했을 때쯤 엄마는 돌아와 나를 다시 데려가곤 했다. 기억에 흔적조차 없는 아빠는 "예수 승리, 빅토리"를 마지막으로 말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고 한다. 그.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떠난 후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다 어느덧 서른여섯이 되었다. 나에게 기다림은 어쩌면 처절함이었을지 모른다. 소년에게 기다림은 딸기라테처럼 조금이나마 달콤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