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없다는 사실보다 무거웠던 것은

이제는 견디는 딸보다 나로 살아가기

by 원지윤


나는 아빠가 없다는 사실보다, 남편 없는 엄마의 자기연민을 견디는 일이 더 힘들었다.


아빠는 오래전에 떠났다. 떠난 사람을 떠난 사람으로만 기억하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죽음은 끝을 만들어준다. 더 이상 물어볼 일도, 되돌릴 일도, 어긋날 일도 없다. 남은 사람들은 그 끝 주변에서 살아간다. 내게는 그 끝이 아빠였고, 그 뒤로 이어진 길이 엄마였다.


엄마는 남편이 없는, 불쌍한 여자로 스스로를 정의내리며 살았다. 그 말은 서류에 찍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루의 공기처럼 번지는 감정이었다. 엄마의 말투, 한숨, 음식의 간, 전화의 길이, 명절을 앞둔 기색 같은 것들. 엄마는 자신이 참 불쌍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문장에 그 의미가 달려 있었다. 엄마의 자기연민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였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해도 도착지는 늘 거기였다. “너희 아빠만 살아 있었어도.” “내 팔자가 그렇지.” “나는 누구한테도 기대지 못해.” 그렇게 엄마는 자신의 생을 한 장의 설명문으로 고정해두었고, 나는 그 설명문 옆에서 자라야 했다.


아이였던 나는 그 감정을 엄마의 슬픔이라고 배웠다. 엄마가 슬프면 내가 조용해져야 했고, 엄마가 힘들면 내가 더 착해져야 했다. 엄마가 우울하면 나는 웃지 말아야 했다. 집 안에서 기쁨은 늘 누군가의 상처를 찌르는 소리로 들릴 수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슬픔을 위로하는 법보다, 슬픔을 자극하지 않는 법을 먼저 익혔다.


아빠의 부재는 빈자리였지만, 엄마의 자기연민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었다. 빈자리는 익숙해질 수 있다. 빈자리는 생활의 패턴으로 굳는다. 그러나 움직이는 슬픔은 날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나서, 내 하루를 계속 시험했다. 어떤 날은 분노로, 어떤 날은 비난으로, 어떤 날은 죄책감으로. 나는 늘 그 감정의 기압을 읽으며 살았다. 엄마가 폭풍으로 번지지 않도록, 내가 먼저 눌러야 했다. 그게 내 역할인 줄 알았다.


얼마 전 꿈을 꿨다. 아빠를 모신 추모공원에 산불이 났고, 산소가 다 타버렸다. 검은 재가 되어버린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장례를 치렀다. 화장을 하고, 납골당으로 옮기는 절차를 밟았다. 오빠와 엄마와 내가 함께였고, 이상하게도 꿈 속에서는 모든 일이 지나치게 정확했다. 서류를 작성하고, 안내를 듣고, 시간에 맞춰 움직였다. 꿈은 늘 엉성한데 그날의 꿈은 너무 체계적이었다. 마치 슬픔마저도 절차대로 정리해야 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 울고 말았다. 소리 내어 울었다. 누가 다독여도 멈추지 않는 울음이었다. 아빠를 잃었을 때는 울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려서가 아니라, 울면 엄마가 더 무너질까 봐 울지 못했다. 엄마가 무너지면 집이 무너질까 봐. 나는 늘 ‘버티는 사람’이었고, 그 역할이 내 몸에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


꿈에서 내가 운 것은 아빠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에 타버린 산소는 아빠의 자리이기도 했지만, 내 안에 남아 있던 정리의 방식이기도 했다. 그 자리가 사라지자 내가 기대고 있던 것들도 함께 무너졌다. 나는 아빠를 다시 보내는 울음을 운 동시에, 엄마를 견디며 살아온 세월을 한꺼번에 토해낸 것 같았다. 그동안 참고 눌러둔 감정들이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며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꿈에서 깨어나 한동안 멍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런 꿈은 아직 고인을 보내지 못해서라고. 물론 그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보내지 못한 것은 아빠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아빠 없는 삶보다 엄마의 슬픔이 내 삶까지 점령하는 방식을 더 오래, 더 깊게 견뎠다. 그래서 내 애도는 아빠에게만 걸려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만들어낸 집의 공기에도, 그 공기 속에서 착해지는 법을 배운 내 어린 나에게도 걸려 있었다.


이제는 그 연결고리를 조금씩 끊는 연습을 하고 싶다. 엄마의 우울이 엄마의 것일 수 있도록, 엄마의 자기연민이 내 책임이 되지 않도록. 그건 엄마를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나를 살리겠다는 뜻이다. 엄마가 불쌍하다는 전제에서 벗어나, 엄마를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싶다. 불쌍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선택하고 실수하고 후회하는 한 인간으로. 그 인간의 감정이 내 삶을 잠식하지 않도록 선을 긋고 싶다.


아빠는 이미 떠난 사람이다. 그래서 아빠와의 관계는 끝이 있다. 하지만 엄마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의 관계에는 끝 대신 경계가 필요하다. 나는 이제야 그걸 배우는 중이다. 불이 났던 꿈은 내게 말한다. 어떤 자리들은 영원하지 않다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다시 옮겨야 한다고. 땅에서 칸으로, 감정에서 절차로,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슬픔에서 나의 삶으로.


다음에 또 그런 꿈을 꾸게 된다면, 나는 조금 덜 울고 싶다. 아니, 울어도 좋다. 다만 그 울음이 견디는 딸의 울음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사람의 울음이었으면 좋겠다.






이전 12화감정 쓰레기통을 사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