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아 잘 지내니
어제부터 몸이 좋지 않아 오늘은 자격증 수업을 오전에 빨리 듣고 사우나에 다녀왔다. 온탕에 몸을 담그면 뻣뻣했던 등과 어깨가 많이 풀어진다. 그리고 어느 정도 몸이 풀어지면 습식사우나에 간다. 한참 땀을 빼고 냉탕에 들어가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몸이 깃털까진 아니더라도 전보다는 훨씬 가벼워진다. 나만의 컨디션 관리법이랄까.
3월부터 다니던 사우나인데 아이가 학교 간 사이에만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자주는 안 가지만 가는 날엔 거의 같은 시간대에 간다. 사우나에 가면 언니동생하며 지내는 한 그룹 있다. 연령대는 5060처럼 보이고 밖에서도 만날만큼 가까워 보였다. 인생 선배들인 그녀들이 하는 이야기를 귀동냥으로 듣다 보면 재미도 있고 도움이 많이 된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사우나에 오랜만에 온 정숙언니가 이 자리에 없는 순영언니의 남편이 달건이라는 소식을 미숙이와 현숙이에게 들었다고 이야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옆에 있던 금자언니는 말도 말라면서 그 일로 한바탕 일이 있었다며 이제부터는 자리에 없는 사람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했다고 했다. 내가 알아들은 그녀들의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제주어인 데다 빠르기까지 하니 어미만 알아들을 뿐이었다. 이해하고 싶어 죽겠는 나의 쓸데없는 열정은 대충 문맥상 흐름을 파악하고 그녀들의 표정을 읽어가며 더듬더듬 퍼즐조각 맞추듯 사건을 추론해 갔다. 한국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하다니 외국어가 따로 없었다. 노력을 해도 뭐뭐했지마씸, 어멍아방, 뭐뭐하잰 등 이런 조사와 어미만 알아들을 뿐이었다. 역시 언어는 어휘력이다.
사건의 진상은 이러하다. 순영언니의 남편이 달건이라는 소리를 미숙이와 현숙이가 정숙언니에게까지 전화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했고, 그 사실이 순영언니 귀에 들어갔다. 순영언니는 미숙이와 현숙이에게 뭐라고 하였지만 그녀들은 정숙언니에게 들었다며 둘러댔고 순영언니가 그 사실이 거짓말인 줄을 알고 정숙언니를 오해하진 않았지만 화가 많이 났고 주변에 있던 언니들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그런 이야기인 듯했다.
5060이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남 말하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어디에나 있구나 싶었고 고등학교 때가 생각이 났다. 나는 고등학교 내내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했다. 짝꿍과만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 짝꿍은 어느 큰 무리에 속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에 없는 아이를 무조건 욕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몇 명은 절대 모임에 안 빠지려고 한다고 했고 그 모습이 참 뭐 같다며 조만간 자기와 자기 친구도 나올 예정이라고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진짜 얼마뒤 내 짝꿍은 그렇게 그 무리에서 나왔다. 나왔다고 해서 나와 그룹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염세주의에 빠져있던 것 같다. 여고였는데 당시에는 여자들의 세상이 버겁게만 느껴졌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아이들의 표정과 억양, 미친 듯이 오르내리는 감정이 너무도 불편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남녀합반 중학교를 다니다가 여고에 오니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나는 3년 내내 적응하지 못했고 수능 전날에 3대 30으로 싸웠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3은 나, 짝꿍, 짝꿍의 친구였고 나머지는 반 아이들이었다. 교실 뒤쪽을 지나가는 나에게 칠판지우개를 던진 아이도 있었다. 반장은 나서서 나에게 욕을 했다. 아마도 혼자 말도 안 하고 급식대신 혼자 도시락을 먹으며 칙칙하게 지내는 내가 거슬리고 재수 없었던 것 같다. 반장은 쪽수로 봤을 때 담임선생님이 알게 되면 불리하다 여겨서였을까 내가 이르기 전에(나는 담임에 대한 신뢰가 없었으므로 애초에 이를 생각이 없었다.) 발 빠르게 담임선생님께 유리하게 설명했는지, 나와 함께 대응해 준 짝꿍과 짝꿍의 친구와 함께 교무실로 소환됐다. 선생님은 우리셋을 세워놓고 내 짝꿍에게 “너는 왜 다른 애들이 싫어하는 얘랑 노는 거야? 다른 애들이 안 노는 데는 이유가 있어. 놀지 마! “ 라며 화를 냈다. 순간 자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온몸이 떨렸다. 용감한 내 짝꿍 수진이는 ”아니. 선생님이 하실 말씀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얘 바로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선생님이 놀지 말라니요. “ 라며 화를 냈다. 옆에서 지켜보면 내 짝꿍의 친구도 황당함을 표정과 몸짓으로 나타냈다. 쪽수에서 이미 밀렸기도 했고 (사실 1대 30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짝꿍과 짝꿍의 친구는 내편을 들어준 것이니..) 칠판지우개를 맞은 건 나였다. 반장은 어떻게 말을 했던 것일까. 반박할 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날 수능만 치르면 학교에 안 나와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그렇게 수능전날 물의를 일으킨 문제아가 되었고 종례시간에 담임선생님을 포함해 모두의 야유를 받아야 했다. 나는 수능을 말아먹고 두문분출했다. 나는 엄마를 속이기 위해 아침에 교복을 입고 나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 수시입학이 확정된 중학교 때 친구와 함께 운전면허를 따고 놀았다.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나중에 교무실로 졸업장과 앨범을 찾아가야 했다. 그 이후에도 짝꿍과 짝꿍의 단짝에게 나란 존재가 민폐처럼 느껴졌고 나 때문에 반 친구들과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것 같아 그날 이후로 연락을 끊었다. 그렇게 나에게 고등학교 학창 시절은 없다.
수진이는 고등학교 때 쓰던 번호를 아직도 쓴다. 나는 여러 번 번호를 바꿨다. 핸드폰을 바꿀 때마다 간직해 온 수진이 번호. 아직도 저장해서 카톡 프로필로 보곤 하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랑 결혼해서 딸내미 둘을 낳고 알콩달콩 예쁘게도 사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고 보는 나까지 행복해진다. 정말 너무 연락을 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 때문에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게 한 게 미안해서. 건강하고 행복해라 수진아. 고마웠어. 그 기억은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친구야.
*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밝힙니다.
이미지출처: 핀터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