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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Jul 19. 2024

시아버지가 지으신 아이 이름

팽팽한 신경전의 결말은

2016년 11월에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2.62kg으로 작았지만 의사 선생님은 자가호흡도 잘하고 건강해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막 태어나 목욕을 하고 모자동실을 하러 온 아이를 보고 있자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태명은 땡큐였다. 내가 지었다. 그냥 된소리가 태아에게 좋다고도 하고 우리 부부에게 와준 것 자체가 고마워서 그렇게 불렀다. 양가집안에서도 그리 불러주셨다. 우리는 자연주의 출산을 해서 남편이 둘라 역할을 맡아서 해줬다. 둘라는 출산 전과 후에 산모 옆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서 진통도 함께 겪고 모유수유를 비롯한 육아를 도와주는 사람을 뜻한다. 바람직하게도 남편의 둘라역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남편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과 순간을 생생하게 함께 했다. 그래서 그런지 뱃속에 있을 때보다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했다.


출산한 다음날 아침, 친정엄마가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오셨고 산후풍이 들면 안 된다며 수면바지, 수면양말, 직접 뜬 털모자, 걸치는 숄을 챙겨 오셨다. 친정엄마는 내가 몇 번이고 전화를 받지 않는 게 이상해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진통 중이라고 했더니 서둘러서 오신다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19시간 진통을 했으니 연락이 안 되는 게 이상할만했다. 그런데 남편은 오셔도 계실 곳이 없으니 아이가 태어나면 연락드리겠다고 했단다. 그때부터 엄마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을 달래느라 뜨개질을 하셨고 순산소식을 기다리며 모자를 뜨셨다고 한다. 손자를 처음 본 엄마는 아이를 한번 안아 보시고는 너무 작아 놀라신 눈치셨다. 단둘이서 어떻게 큰 일을 해냈냐며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셨다. 시댁에는 태어나자마자 사진 찍어서 단톡방에 올렸더니 깜짝 놀라시면서 거의 축제의 분위기로 바뀌었던 것 같다. 병원에서 5일 있었는데 마지막날에 시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아이를 보셨다. 시아버지는 오시자마자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아이 이름들이 적힌 종이였다. 영주, 지민, 성빈, 석문 등등 예닐곱 개 정도 있었다. 그중에는 작은 아버지 성함과 사촌아가씨 이름도 있어서 바로 신뢰를 잃었다. 원래 제대로 된 작명은 가족과 친인척의 이름은 빼고 작명을 한다고 들었다. 나는 퇴원수속을 밟았고 병원을 나왔다. 아직은 아이를 안는 것이 어색한 나 대신 시어머니가 겉싸개에 싸인 아이를 척 안아주셨다.


시아버지는 대학동문 축구경기가 있어 그곳으로 가셨고 시어머니가 조리원까지 동행해 주셨다. 병원에서 조리원은 꽤나 거리가 있었는데, 가는 동안 아이 이름이야기만 했던 것 같다. 사실 시아버지가 지어오신 이름 중에는 마음에 드는 이름은커녕 거기서 하나라도 하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초보며느리 시절ㅋㅋㅋ)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자꾸 별로라며 생각해 본다고만 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나를 눈거울로 보시며 "'석문'이 이름이 제일 좋다. 아들을 생각하세요."라고 하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각은 잘 안 나지만, 학문을 갈고닦는다는 의미 때문에 제일 마음에 드시는 듯했다. 역시 선생님. 아이 이름은 내가 자주 부르고 아이가 평생 듣고 사는 것이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 아이 이름을 '석문'으로 하기 싫었다. 조리원은 외부인은 출입금지라서 우리만 내려주시고 시어머니는 가셨다.


조리원에 들어와서 아이는 신생아실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몇 가지 체크를 했다. 그 사이 우리 부부는 배정받은 방에 들어가 짐정리를 했다. 나는 들어오자마자 "석문이 엄마 하기 싫어. 절대 절대 안 할 거야. "라고 하며 울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편은 당황한 눈치였다.


"아유. 그럼. 나도 별로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 마. "

"무슨. 그럼 아까 어머니한테 안 한다고 했어야지. "

"그래서 별로라고 했잖아. "

또 시작됐다. 시댁 발작버튼. 시댁일 앞에서는 항상 조급해지고 불안이 엄청 커져서 남편에게 따지게 된다. 그게 또 싸움으로 번지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절대로 절대로 석문이엄마는 안 해. "

"알겠어. 따로 우리가 작명 알아보든지. 우리 둘이 상의해서 지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화나있으면 모유에 안 좋대.  "

모유에 안 좋다고 하니 바로 마음을 고쳐먹게 되는 모성애는 위대했다.


일단 남편을 믿어보기로 했다. 남편은 시어머니에게서 아이 이름은 뭐로 할 건지에 대한 전화를 꽤나 많이 받았다. 자꾸 방을 나가서 전화를 받고 문틈으로 들어보면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라는 소리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마도 시아버지 면을 세워주려는 어머니의 정치활동이었던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정한 작명소에 신청해서 이름을 받는 일주일 동안 석문이 엄마아빠가 되지 않으려고 우리는 애썼다. 남편은 부르기가 어렵다, 성문인지, 석문인지 여러 번 반복해야 할 이름이다, 너무 고전적이라 시대와 맞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다 안되시겠는지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남편을 설득해 석문으로 하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남편이 완강히 반대해서 어쩔 수 없다고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실랑이하다가 작명소에서 온 이름들 중 하나를 주저 없이 정할 수 있었다. 이제 출생신고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남편을 믿었고 남편은 해냈다. 조리원에 있는 나에게 출생신고서를 보내왔다. 드디어 우리는 석문이 엄마 아빠가 되지 않았다. 출생신고서를 본 순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꺼질 듯 말 듯 도사리던 불안이 사라졌다.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찔하다.


내가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구나’를 떠올리면 이때의 일이 생각난다. 얼마나 겁을 내고 힘들어했는지 제대로 나의 의견을 말할 줄도 모르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나는 지난 9년간 시댁에 눈치를 보며 나의 말을 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그랬다. 바보스러운 시간들을 지나 이제는 당당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고 있는 것 같긴 하다. 조금 더 부드럽고 현명하게 하고 싶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했던 시간. 나는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손자 이름에 훈수두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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