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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Aug 13. 2024

시어머니가 퇴직을 당긴 이유

영혼이 쉴 곳이 없다는 시아버지

일요일 오후 제주공항. 시어머니가 오셨다. 겨울에 뵙고 6개월 만에 뵙는 건데, 사실 계절이 바뀌다 보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오시자마자 자주 못 보는 손자 장난감을 사주고 싶으시다며 바로 마트에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다 같이 마트에 갔고 아이가 남편과 장난감을 고르는 사이, 어머니가 퇴직을 당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구구절절 길고 지루하며 별 볼 일 없는 이야기도 아름답게(본인 유리하게) 포장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매달 나가는 대출이자에 갑자기 현타가 왔고 일 년 정도 당겨도 상관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셨단다.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뎌디게 진행되다보니 답답하셨던 (늘 있던 일) 시아버지가 어느 날 술을 드시고 들어오시더니 영혼이 쉴 곳이 없다고 하시며 직장에서 하듯이 나에게도 웃는 얼굴로 대해달라고 하시고는 집을 나가 작업실로 가셨다고 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너무 내가 일에만 매진해서 남편 일이 안 풀리는 거 아닌가. 집에서 내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셨단다.


40년 가까이 해온 일에 대한 마무리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대출 이자에 대한 순간적인 현타와 특별할 것 없는 남편의 육십춘기의 찡얼거림으로 한방에 정해졌다는 게 사실 다 믿기진 않았다. 시어머니로서는 별로지만 일에 있어서는 실력도 있으시고 뚝심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정년퇴직을 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일 년을 남겨 두고 퇴직하신다니. 교사라는 직업에 엄청난 사명감과 지나친 자부심이 있으셨고 삶의 모든 곳에서 교사이셨던 분이, (신혼 초 내가 기억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은 나를 궁금해하기보다 이 대단한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온 이상 단단히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간다. ) 교육장까지 지내셨던 분의 마지막 행보가 조금 놀랍긴 했다. 중간에 일이 빠그라지는 건 시아버지의 전매특허인데 시어머니가 그걸 하시겠다니 의외긴 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싶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대출을 퇴직금으로 하루라도 빨리 정산을 하고 여태껏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남편의 내조를 하겠다며 빌드업된 퇴직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구마 캐내듯이 줄줄이 진짜 이유들을 나는 혼자 알아챘다. 올해 일 년만 교장자리에 있고 다음 일 년은 높은(?) 자리가 예약되어 있는 데 그냥 이쯤에 그만두신다고 했다. 난 그 이유를 안다. 아주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이유는 교육자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한순간에 아작 나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야흐로 작년 추석즈음 시누 형님(남편의 누나)이 그때로부터 약 2년 전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해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서류상 정리까지 다 하고도 알리지 않았고 쇼윈도 부부로 가족모임에 함께 참석을 했기에 아무도 몰랐다. 물론 약속장소에 각자 따로 오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서로 바빠서 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형님은 이혼소식을 알린 지 몇 달 되지 않아 재혼상대가 있음을 알려왔고 어머니는 이혼에 재혼이라니 당시 교육장을 하고 계셨는데 사람 만나기가 무섭고 싫어 일을 그만두고 자연인이 되고 싶은 심정이라고 나에게 토로하셨을 정도로 힘들어하셨다. 사실 이혼과 재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머니 사전에 이혼은 없는 것이었다. 본인이 수도 없는 이혼의 위기를 겪고도 결혼을 유지할 수 있었던 버팀목은 당시 이혼녀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교육자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가장 큰 버팀목은 자식들이었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나 첫째이자 딸인 형님은 어머니에게 또 다른 자신, 분신과도 같았다. 어머니의 결혼생활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자녀교육과 자녀의성공. 그러나 시누 형님은 어머니 아버지의 기대만큼 되지 못했고 (SKY출신 아버지를 따라 SKY에 가겠다는 포부는 삼수를 한 끝에도 닿지 못했고 수도권에 있는 사립대 교육과에 들어갔으며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어머니처럼 정교사가 되는 꿈은 임용고시를 합격하지 못해 기간제 교사로 7년을 일했고 작년말 사립고에 정식 임용이 됐지만 여전히 국공립 임용에 도전 하고 있다고 한다. ) 누구나 미생인 인생인데 어머니는 형님의 부족한 점들이 드러날 때면 그게 누구든지(사촌아가씨들과 나, 작은 어머니들) 깎아내리며 감싸야했다. 그런 일이 9년 째 반복되다보니 며느리인 나에게는 오래 상처로 남아, 시누 형님과 직접적인 일이 없었음에도 시누 형님의 이름만 들어도 경기가 나는 병이 생겼다.


퇴직을 당긴 진짜 이유는 아직도 시누 형님의 이혼과 재혼을 못 받아들인 어머니를 보며 알 수 있었다. 높은 자리에 가면 자녀들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곤 하는데 더군다나 형님은 스물여덟에 초혼을 했고 우리 남편은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기에 요즘 30대에나 할까 말까 한 자녀들의 결혼을 어머니는 이미 끝내셨고 게다가 우리 아이 덕분에 할머니가 된 지 10년이 다되어가시니 어딜 가나 그 사실이 주목을 받아 오셨다. 형님의 이혼 이후로 자녀들을 일찍이 결혼시키고 할머니까지 된 사실이 주목받거나 대화중에 자녀들 이야기가 나오면 목에 생선가시가 걸린 듯 불편해 하셨다.


형님의 재혼식 날 평생 잊지못할 장면을 목격했다. 신랑 측 손님으로 온 어느 중년여자 손님이 신부 측 혼주로 서있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자기 딸 결혼했잖아! "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했고 온 몸이 굳어 어찌할 바를 몰라하시는 것을 봤다. 안타까운 장면이었지만 그동안 시누 형님 감싸느라 나에게 준 상처들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고소했는지 모른다. 시누 형님은 초혼을 얼마나 뻑적지근하게 했는지 모른다.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모두 그 지역 토박이셨으니 손님이  정말 많았다. 초대 가수까지 불렀고 식장에 모든 하객이 뺑 둘러 서있을 정도였고 방명록은 두권이나 나왔다. 그때 왔던 손님이 이번 재혼식에 신랑 측의 초대를 받고 왔을 줄이야. 처음 보는 어머니의 그런 얼굴빛을 보고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목에 걸린 가시를 저런 표정으로 매일 마주할 사람은 없으리라. 내가 상상한 그 이상으로 힘드셨구나 싶었다. 그래서 높은 자리가 예약되어 있지만 쿨하게 퇴직을 선택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형님의 임신소식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출근을 하자마자 설거지하는 내 등에 대고 어머니는 "너 시누한테는 연락했니? "라고 물으셨다. 겨울에 방문하셨을 때 나는 분명 두 분께 이야기했다. 형님의 이야기를 더 이상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 듣고 싶지 않다고. 이유는 다음화에서 밝히겠다. 내가 내 핏줄도 아닌데 연락을 왜 내가 해야 하는건지 근본적인 질문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왔지만 옆에 있던 아이가 신경쓰였다.


"아니요. 서로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네가 그때 그렇게 하고 갔는데 걔가 어떻게 먼저 연락을 하겠니. "

재혼식이 끝나고 형님에게 식과 관련해 서운함을 토로했고 어른스럽게 잘 마무리된 일을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그건 그날 서로 잘 이야기해서 끝난 일이라니까요. "

"임신했다. "

"잘됐네요. "


사실 내 형제도 아닌 사람, 직접적인 악감정은 없지만 어머니 때문에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기에 연락을 할 이유도, 필요도 못 느꼈다. 나는 그저 동생의 아내로, 조카의 엄마로 내 역할에 충실하면 될 것이고 시누 형님은 그전에 살던 집을 정리하며 그 이야기를 새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어머니 아버지께 신신당부해서 도대체 언제까지 말하지 말라는 거냐고 했다던데. 우리보다 본인의 재혼과 새사람하고 풀어가야 할게 더 많아 보여 연락하지 않은 것도 있다. 일종의 배려랄까. 그런데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대뜸 연락을 하지 않는 나를 나무라시는 시어머니를 보고 정말 사람이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저런 걸까 싶었다. 남편은 어린 시절, 시아버지는 술 드시고 오시면 어머니를 폭행했고 누나는 자게 내버려 두고 자신만을 깨워 몸을 피했던 엄마라며 이제는 우리가 다 독립했는데도 왜 이혼을 안 하는지 의아해하곤 했다. 그런 남편과 어떤 정이 있을까. 시아버지는 친구들과 지인들 사이에서 유머러스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의 개그와 유머는 한 사람을 상처 주는 방식이었고 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그 대상이 시어머니였고 내가 온 이후 나로 타깃이 바뀌었었지만 받아주지 않아 만나면 뚝딱거리시곤 한다. 그게 가볍든 무겁든 나를 밟고 올라서고자 하는 자는 불쾌감만 남긴다는 걸 한 번이라도 당해본 사람은 안다. 내가 모르는 그들의 서사가 있기에 지금까지 연을 이어나가는 것이겠지만 서울과 지역에서 주말부부, 한 달 부부를 하며 지내신 정이 살가운 것도 아닐 텐데 어디서 샘솟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퇴직을 앞당기게 하였는지 너무 궁금하다.


모두 차치하고 형님의 임신소식과 함께 황혼육아에 뛰어들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았다. 현직에 있을 때 손녀가 태어나면 축하인사에 설명에 골치가 아프시지 않을까. 목에 걸린 생선가시를 매번 마주해야 하는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전부인(실제로 핸드폰에 그렇게 저장되어 있음) 딸의 육아를, 딸의 경력을 지키는 것 또한 교육자 할머니로서 자존심이리라. 형님은 아직 낳기도 전에 셋은 낳을 것이며 아들을 낳을 때까지 낳는다고 했다고 한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육아에 정신없으셔서 내가 형님에게 연락을 하는지도 잊으실 만큼 말이다.


얼마나 딸의 이혼과 재혼을 받아들이시지 못하고 계시는지 알게 된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절만 다니곤 했는데 얼마 전에 용한 철학관이 있다기에 갔는데 거기서는 아기가 없는 결혼은 결혼으로 안친대. 시누는 지금 결혼운이 들어서 지금이 진짜 결혼인거지. 사귀고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다. "


'뭔 개소리야'라는 생각에 차마 공감과 동의를 못하겠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아직도 시누 형님의 이혼과 재혼이 받아들여지지가 않으신가보다. 정신승리 최강 어머니. 파이팅이요.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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