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선생님의 꼰밍아웃
진료가 있는 날이다. 오늘은 아이가 방학이라 진료만 받고 얼른 들어와야 했다. 평소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를 가거나 도심마트에서 시장을 보면서 기분전환을 한다. 그래도 병원에 오는 날은 아주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온전히 내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들어주는 의사 선생님 생각에 마음이 은은하게 따듯해진다.
똑똑.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음, 그냥 특별히 생각나는 건 없네요. 그냥저냥 잘 지냈나 봐요.”
“아이에게 화를 내시거나 감정조절이 안되셨던 부분은 어떠셨어요?”
“오. 그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약 주신 이후로 갑자기 화를 내거나 소리치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네요.”
“음, 다행이네요. 그럼 그 약은 조금 더 유지할게요. 잠은 어떠셨어요?"
"잠은 잘 자요. 그런데 엊그제 남편이 일찍 출근한다고 아이 옆에 가서 자라며 깨워서 2층에서 1층 내려가는 계단에서 순간 기절을 해서 다쳤어요. "
"어머. 어머. 놀라셨겠어요. "
"남편이 많이 놀랐더라고요. 남편이 먼저 내려가고 조금 이따 제가 따라 내려갔는데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서 뒤돌아보니 제가 계단에서 굴러내려 오는데 딱 잡아 챘다고 하더라고요. 거의 다 내려와서긴 하지만. 그런데 신기한 게요,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까지만 기억이 나고 그다음은 제가 넘어지고 계단에 앉아서 물 좀 달라고 했어요. 그 사이는 기억이 안 나요. 혹시 약기운 때문일까요? "
"그게 몇 시였을까요? "
"새벽 세시요. "
"아무래도 새벽 세시에 움직이신 거면, 약은 정신을 잠자게 하는 데 몸은 움직이려니 그럴 수 있다고 봐요. 그리고 평소에도 어지럽거나 기절을 하신다거나 하신 게 아니시라면 약기운 때문일 가능성이 크죠. "
"그렇군요. "
"음. 일단 약은 한번 더 유지할게요. 새벽 세시에 일어날 일이 드물기는 하니까요. "
“네. 아, 그리고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오신다는 소식이 있어요. 다음 주에."
“어아.... 그러시군요. 아이고. 괜찮으세요?”
“어머니는 제주에서 연수가 있으셔서 오시는 김에 저희 집에 들르신다는데, 첫날밤은 그냥 주무시고 다음날 아침 연수하러 가셨다가 끝나는 날 아버지와 함께 오셔서 2박 3일 동안 저희 집에서 묵으신다는데, 저는 워크숍 가려고요! ”
“오호. 남편은 뭐라고 하시는지. “
“흔쾌히 허락했어요. 그렇게 하래요. ”
갑자기 의사 선생님의 꼰밍아웃이 이어졌다.
“사실, 저도 꼰대라 ‘부모님이 오시는데 어딜 가’라는 주의이긴 하지만, 저는 환자분의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
“감사해요. 흐흐”
“함께 있는 생각 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고 힘드시다면 피하시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환자분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시든지요. 파이팅."
지난주에 차비가 없으셔서 못 오신다는 시아버지의 말에 크루즈다 생각하시고 배 타고 오시라고 했는 데 진짜로 배를 타고 오신단다. 오 마이갓. 사실 그때 아무 말씀이 없으셔서 안 오시는 줄 알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나는 그냥 한 말이었는 데 현실이 되다니. 남편이 그러는 데, 저번에 오셔서 렌트하시느라 고생하셨던 것 때문에 아예 차를 직접 가지고 오시려고 배 타고 오시는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어머니만 오시면 이참 저 참 버텨볼 참이었는 데 아버지까지 오시니 이젠 진짜 피신해야 할 상황이다. 항상 시아버지가 다녀가시면 우리 부부에게 사달이 나곤 하기에 이번만큼은 그런 스잘데기 없는 것에 에너지 소진을 하고 싶지 않아 9년 만에 처음으로 결심했다. 1박 2일 외박에 자유부인을 하기로.
광복절은 빨간 날이라 남편이 아이를 보면 되는데 문제는 다음날이다. 평일인 데다 아이가 방학이라 남편은 출근을 해야 하니 아이와 함께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를 같이 가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고민하는 나를 가만히 보던 남편은 그냥 하루쯤은 아이를 어머니 아버지께 맡기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이제 아홉 살이나 됐으니 혼자 화장실도 갈 수 있고 자기 의사표현을 어느 정도는 잘하기에 괜찮을 것 같았다. 아이에게 할머니 할아버지와 데이트하는 거 어떠냐고 물어보니 아이도 좋다고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해달라는 거 다 해주니까. 그럴 줄 알았다.) 이참에 나도 시댁에 아이 한 번 맡겨 보고 자유부인 좀 되어보기로 했다. 처음 맡기는데, 사실 어머니 아버지는 내가 없이 편하게 손자와 시간을 보내고 싶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해오긴 했다. 이번만큼은 두 분에게 손자와 데이트를 해 볼 기회를 드리는 걸로.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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